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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종말, 신인류의 서막, 아서 C. 클라크의『유년기의 끝』 본문

감상/책

인류의 종말, 신인류의 서막, 아서 C. 클라크의『유년기의 끝』

들림 2012. 3. 28. 08:51



유년기의 끝

저자
아서 클라크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02-09-0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외계 문명과의 '최초의 접촉'과 '인류 진화의 비밀'을 둘러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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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시절. 나는 창가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수업이 지루하고 교실이 답답할 때면, 창밖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그중 가장 많이 했던 상상은 외계인의 침공에 관한 것이었다. 운동장 위에 거대한 비행물체가 나타나고, 레이저 미사일이 도시를 파괴하는 상상. 간혹 공상에 너무 몰두할 때면, 좋아하던 여학생을 구하러 가야할지 가족을 구하러 가야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처럼 인간이 외계생명체와 만나는 것은 SF의 단골 소재이다. 《미지와의 조우》,《ET》처럼 인간에게 우호적인 외계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주전쟁》, 《인디펜던트 데이》처럼 적대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인간과 외계인이 만나는 설정을 SF에서는 '최초의 접촉 The First Contact'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Childhood's End』(1953) 역시 '최초의 접촉'에 관한 이야기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는 동ㆍ서로 나뉘어 냉전체제에 돌입한다. 무분별한 군비경쟁이 일어나고, 한편에서는 우주를 향한 레이스가 펼쳐진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등 세계의 도시 위에 거대한 우주선들이 나타난다. 우주선의 주인은 외계종족인 오버로드. 지구의 감독관인 오버로드 케렐런은 자신들의 모습을 감춘 채, UN의 사무총장인 스톰그렌과 접촉하며 세계를 바꿔나간다.

 오버로드들은 50년 동안 지구에 머무르며 무지, 질병, 가난, 범죄, 전쟁 등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마침내 케럴런은 모습을 드러내고, 악마를 닮은 충격적인 외형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만 이미 5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라 큰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유토피아는 계속 되고, 인간의 우주를 향한 도전은 거의 사라진다. 물리학자인 잰 로드릭스는 오버로드가 가져갈 고래 박제의 뱃속에 숨어 밀항을 시도하고 그들의 행성에 방문한다.

 잰에게는 6개월, 지구에는 8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잰은 지구로 돌아오게 된다. 마침내 오버로드들의 역할이 그들보다 위에 있는 존재인 오버마인드와 인간의 중계자임이 밝혀지고, 인류는 오버마인드의 뜻에 따라 진화하게 된다. 최후의 진화가 시작되고, 인류는 자취를 감춘다. 마지막 인류가 된 잰은 사라져가는 지구 위에서 인류의 유년기가 끝나는 것을 보게 된다.

 『유년기의 끝』의 작가 아서 C. 클라크는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 로버트 A. 하인라인(1907~1988)과 함께 SF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고 한다. 우리에게 영화로 유명한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도 아서 C. 클라크의 작품이다. 1917년 영국에서 태어난 아서 C. 클라크는 2차세계 대전에는 공군 장교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의 킹스칼리지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비록 앨프리드 베스터의『파괴된 사나이』에게 1회 휴고상(Hugo Award는 매년 전 해의 최우수 과학 소설과 환상문학 작품에 대해 수여하는 과학소설상으로 네뷸러상과 함께 가장 권위있는 SF 상이다.  -위키백과-) 수상의 영광을 내어주긴 했지만,『유년기의 끝』은 SF 10대 명작 안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그의 놀라운 상상력은 후에 많은 후배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종족의 배경 스토리에 등장하는 오버로드와 오버마인드도 아서. C. 클라크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론가인 브라이언 애쉬에 따르면 우주 지성과 정신의 진화라는 부분은 울라프 스태플든의 『스타메이커』(리뷰보기 http://gooz.tistory.com/25)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년기의 끝』은 『스타메이커』의 묵직하고 깊은 부분을 닮아있다.

 인류 진화의 과정을 다채롭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년기의 끝』은 여러 시대,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우주선 개발자, UN 사무총장, 물리학자 등 다양한 인물들은 인류의 진화를 맞이하는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가령 UN 사무총장인 스톰그렌이 저항파들에게 납치되는 부분은 아무리 평화로운 지배라도 자유가 박탈당하는데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저항을 보여준다.

 이러한 부분들은 『유년기의 끝』에서 의미없게 그려지는데, 사실 여기에는 놀라울만큼 위험한 아서 C. 클라크의 역사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차원 높은 외계 생명체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지고 문명이 발전한다는 생각은 강대국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한다. 작품 내에도 오버로드와 인간의 관계를 마치 영국과 인도의 관계인 것처럼 비교해놓았는데, 아무래도 꺼림직한 부분이다.

 진화된 인간 역시 어딘가 모르게 무섭다. 집단으로 움직이며, 부모조차 몰라보는 모습. 강력한 힘으로 장난처럼 지구를 파괴하는 부분 등은 아무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영역의 진화라지만 자식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파괴되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 최후의 인류 잰 역시, 이러한 안타까움을 공유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인간의 주체적인 역할이 거세된 상태에서 주어진 진화라는 불편한 점도 있지만, 『유년기의 끝』은 경이로운 작품이다. 인간이 변화해가는 모습과 오버로드 행성의 장엄한 풍경은 SF 본연의 미덕인 경이로움을 한껏 느끼게 한다. 이러한 아서 C. 클라크의 상상력은 『유년기의 끝』이 커다란 서사 없이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힘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인류의 진화는 『유년기의 끝』과 다른 방향이었으면 한다. 평화와 사랑이 바탕이 된 유토피아. 더 나아가 전 생명과 우주를 아우르는 우주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으로 인류 스스로 도약하는 진화. 그래서 외계생명체와 '최초의 접촉'을 하는 날, 우리는 우주적 존재로 서로를 바라봤으면 한다. 어른과 아이, 상하의 관계가 아닌 우주의 질서 아래 각자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존재 그 자체로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최초의 접촉'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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