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림 평상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배트맨 이어 원』 본문
우리에게 영화로 익숙한 고담시의 영웅 배트맨은 슈퍼맨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영웅 중 하나이다. 배트맨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오래된 동료인 슈퍼맨과 항상 비교되는데, 바로 그러한 점이 배트맨만의 고유한 매력을 만든다. 초능력이 없음. 원색이 아닌 검은 코스튬을 입음. 낮보다 밤에 가깝고, 존경보다 공포와 어울리는 영웅. 배트맨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박쥐'라는 그의 상징만큼이나 어두워(dark) 보인다.
이러한 배트맨의 모습이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부터였을 것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실망을 안겨주었다. 노란색 바탕의 박쥐 로고가 사라진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편인 <다크 나이트>가 세상에 나왔을 때, 잊혀져가던 영웅 배트맨은 부활했고 다시 날아올랐다(rise).
<다크 나이트> 의 성공은 비현실적인 도시와 영웅을 설명해내는 설득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쫄쫄이를 입은 재벌이 더 이상 어린 애들의 공상이 아니게 만든 원동력. 그 성공의 밑바탕에는 <배트맨 비긴즈>가 있었고, <배트맨 비긴즈>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이어 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트맨 이어 원』의 ‘그는 어떻게 배트맨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토대로 놀란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그는 왜 배트맨이 되었는가?’라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훌륭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배트맨의 새로운 시작
『배트맨 이어 원』의 스토리 작가인 프랭크 밀러는 『왓치맨』의 작가 앨런 무어와 함께 80년대를 대표하는 그래픽 노블의 대가 중 한명이다. 그의 작품인 『씬 시티』, 『300』 역시 원작과 영화 모두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프랭크 밀러는 원작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인 <씬 시티>의 영화 연출에 실제로 참여하여 영화감독으로도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배트맨 이어 원』은 프랭크 밀러와 함께 데이비드 마주켈리가 그림을, 화가 리치먼드 루이스가 채색을 맡았다.
『배트맨 이어 원』은 제목 그대로 배트맨의 활약이 시작된 해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요 사건은 고향으로 돌아온 브루스 웨인과 고담으로 발령 받은 형사 제임스 고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배트맨 이어 원』에서 배트맨은 신인답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자신을 지킴과 동시에 적을 떨게 할 마스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경찰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 내부의 친구로 고든을 주목한다.
『배트맨 이어 원』의 구성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어설픈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어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캣우먼의 탄생 역시 볼거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배트맨 이어 원』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은 배트맨에서 항상 주변인물에 머무르던 제임스 고든을 주인공 못지않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배트맨 시리즈에 혁명이라 할 만큼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기본적으로 부자이고 잘생긴 배트맨과 다르게, 어수룩하고 배 나온 중년 제임스 고든은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 역시 배트맨이 하는 영웅적 행위에 못지않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그를 지켜줄 마스크도 없다. 심지어 한 가정의 가장이기까지 하다. 『배트맨 이어 원』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제임스 고든이 겪는 인간적인 갈등과 고뇌는 배트맨이 처해있는 선과 악의 본질적인 갈등보다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온다.
앞서 설명했듯 프랭크 밀러가 『배트맨 이어 원』으로 거둔 성공의 바탕은 현실성이다. 배트맨이라는 컨텐츠에서 상상에 가까운 박쥐인간에게 현실의 옷을 입히는 존재는 바로 제임스 고든이다. 밀러는 제임스 고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배트맨 이어 원』을 통해 이러한 사실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영웅이란 무엇인가?’와 ‘누가 영웅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사실 제임스 고든이 하는 일 - 부패에 저항하고, 범죄와 싸우는 – 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타락한 도시 고담에서 그의 행위는 영웅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동안 제임스 고든의 영웅적인 활약은 배트맨이라는 상징적인 존재의 활약에 묻혀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랭크 밀러는 제임스 고든을 새롭게 시작되는 배트맨 이야기의 다른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시각은 영웅이라는 것이 특별한 존재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선’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배트맨 이어 원』은 흥미로운 오락거리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와 개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새롭지만 사실 결론은 같다. 선은 승리한다. 이러한 『배트맨 이어 원』에서 보여준 프랭크 밀러의 시도는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영웅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슈퍼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래픽 노블의 근본적인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제임스 고든의 아이를 구하는 배트맨처럼 『배트맨 이어 원』은 선이라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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