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림 평상
[단편]시골주막을 돌아보다, 본문
문득 빗물이 고인 거리를 걸을 때, 아무 준비 없이 옛 노래를 듣게 될 때, 며칠을 앓다 일어나 오랜만에 햇볕을 마주할 때, 처음 보는 이의 얼굴에서 낯익음을 발견할 때, 그리고 그 낯익음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럴 때면 작은 단서들 속에 숨어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나에게 다가오곤 한다. 숨어있는 기억들은 세상에 사는 벌레들만큼이나 제각각이다. 어떤 기억은 거미줄에 맺힌 작은 이슬방울 같다. 우연히 어딘가를 지나다가 그런 기억의 덫에 걸리게 되면 나도 모르게 연약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또 다른 기억들 중에는 먼 옛날 보이지 않는 곳에 새겨놓은 문신 같은 기억도 있다. 분명하게 새겨진 삶의 한 장면을 알몸이 되는 순간에야 발견하곤, ‘그땐 참 많이 아팠었지.’ 하고 생각하는 기억 말이다.
그 기억들 중에는 분명 추억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 것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미끄러질 때면 작은 추억의 조각들을 붙잡으려 애쓴다. 그 작은 조각 위에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고, 고통을 견뎌낸다. 하지만 삶이 죽음을 품은 것처럼, 언제나 기억은 망각이라는 또 다른 죽음을 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흔적을 남긴다. 언젠가 꺼내볼 수 있도록 사진을 찍고, 추억의 장소에 가보고, 일기를 쓰는 것.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은 단서라도 있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임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불행들은 ‘시골주막’이라는 술집이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억이라 하기엔 그리 멀지 않은 내 스무 살. 나는 그 모든 기억을 내 머릿속이 아닌 시골주막에 담아 두었다. 추억이 담긴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한 카메라의 메모리카드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그렇게 사라진 파일처럼, 아무리 불러오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미래가 내 술버릇에 대해서 물었을 때 당황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미래는 내가 술에 취하면, 왜 하필 부동산 앞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지 궁금해 했다. 만약 시골주막이 남아 있었다면, 그 아득한 스무 살의 시골주막에 앉아 미래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는 것으로 간단히 답변을 대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골주막이 사라진 지금 미래에게 그 모든 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디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는 알았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맺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채햄 선배, 전생에 소작농이었어요? 왜 술 취해서 부동산 앞에서 노래 불러요?”
함께 술을 마신 다음 날, 미래는 돼지국밥집에서 나에게 물었다. 북적이는 돼지국밥집에서 미래는 ‘섞어’를 시켰고, 나는 ‘돼지’를 시켰다. 미래가 나에게 그 질문을 했을 때, 안경에 서린 뜨거운 김 때문인지 국물은 뿌옇게 글썽이고 있었다. 나는 소면을 먹지 않는 미래의 몫까지 내 뚝배기에 넣으며 말했다.
“니는 햄이면 햄이고, 선배면 선배지. 채햄 선배가 뭐고?”
미래는 입을 샐쭉 내밀고는 새우젓을 한 숟갈 떠서 내 뚝배기에 넣었다. 그러더니 젓가락으로 정구지를 듬뿍 집어 내 눈 앞에 들어 올리며 말했다.
“채햄 선배! 부산에서는 이거 뭐라고 해요?”
“정구지.”
미래는 들어 올린 정구지를 내 국밥에 넣고 저으며 웃었다.
“서울에서는 이걸 부추라고 그래요. 부추.”
미래가 넣은 ‘부추’에서 양념이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다.
“근데?”
미래는 숟가락을 손에 쥐고 꾹꾹 국밥을 섞었다. 몇 번을 말했지만, 마이크를 쥐듯 숟가락을 잡는 미래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 숟가락을 잡아보는 아기처럼 미래의 숟가락질은 언제나 서툴렀다.
“햄은 형이라는 뜻이잖아요? 나는 여자니까, 햄이라 부르기는 싫어요. 그리고 선배만 부르기에는 뭔가 우리 사이가 너무 멀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채햄 선배. 누구는 채햄이라 부르고, 누구는 희담 선배라 부르고……. 나는 채햄 선배를 채햄 선배라 불러요.”
미래는 빈 그릇을 들면서 말했다. ‘이모, 여기 부추 좀 더 주세요.’ 식당 아줌마는 테이블을 닦으며 대답했다. ‘학생 정구지 퍼뜩 갖다 줄게요. 쪼매만 기다리세요.’ 그러니까 정구지가 누구에게는 정구지고, 누구에게는 부추인 것처럼, 미래에게 나는 ‘채햄 선배’였다.
“부산에서 니 같은 애들을 뭐라는지 아나?”
국밥골목에서 나와 롯데리아 앞을 지나며 나는 미래에게 말했다.
“뭐?”
미래의 커진 눈을 따라 눈썹이 움직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움직임이다. 달과 바다처럼 눈과 눈썹이 자연스레 서로를 끌어당겼다가 밀어내는 그 표정 말이다.
“문디 가스나.”
이제 눈이 눈썹을 끌어당길 차례다. 그리고 그 물결은 언덕배기 같은 코에 닿아 입까지 밀려날 것이다. 미래가 입을 내밀기 전에 국밥집에서 가져 온 박하사탕을 미래의 입에 넣었다. 볼록해진 볼 사이에 들어 온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느라, 미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입 안에 박하향이 퍼져갈 때면 미래가 달려와서 내 등을 때릴 것이다. 미래의 손은 맵다. 매운 맛은 사실 고통일 뿐, 맛이 아니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박하처럼 달고 매운 맛이 그런 것이니까. 내게 시골주막과 스무 살이 그랬으니까.
나는 미래에게 시골주막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골주막은 P대 후문과 정문 사이에 있었다.
문창과가 있는 인문대 건물에서 중앙운동장을 지나, 정문 바로 앞 토스트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타로 점이나 사주 따위를 보는 간이 건물과 분식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내가 스무 살이던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길을 계속 가면 돌아가는 길목의 건물 2층에는 선배들과 위닝일레븐 같은 축구 게임을 하던 비디오 게임방이 보인다. 이 골목을 지날 때면 아직 변한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시골주막 역시 남아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방 아래층에 있던 돈가스, 순두부찌개, 치즈떡볶이 등 다양한 메뉴를 팔던 일명 짬뽕 식당이 정말 짬뽕을 파는 짬뽕집으로 바뀐 것을 보면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시골주막이 있던 골목에 접어들면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명언이 생각나며, 그의 극심한 허무주의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 당시 언제까지 있을 것만 같던, 심지어 이름까지 ‘영원교회’이던 교회가 얼마 되지 않은 미래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교였던 우리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교회인 영원교회를 덮밥집인 ‘머거스’가 게걸스럽게 먹어 버렸다. 아마 영원교회가 아직 남아있었다면, 나는 신의 존재를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맞은 편, 시골주막이 있던 자리에는 술도, 밥도, 커피도 아닌, 집을 파는 부동산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던 시골주막이 있던 건물은 이제 집을 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유리창을 까맣게 코팅해버렸다. 시골주막이 있던 자리에는 전 부치는 소리와 탕이 익어가는 냄새도, 음정과 박자까지 취해 비틀거리던 노래들도 이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시골주막에서는 만 원으로 소주 두 병과 계란말이, 감자전, 홍합탕, 꽁치구이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는데, 부동산에서 취급하는 행복은 기본 보증금 몇 백에, 몇 십만 원의 월세와 많게는 몇 억의 건물들뿐이었다. 나는 내 말을 들으며, 고고학자처럼 주변을 살피는 미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여가 시골주막이 있던 데다.”
저녁 시간, 새학기를 맞이하여 북적이는 머거스 앞을 지나면서 미래가 물었다.
“채햄 선배, 진짜 교회 계속 있었으면 채햄 선배가 신을 믿었을까요? 그런데 왜 무굔데 영원교회는 사랑했어요?”
나는 대답 대신 ‘전주막걸리’라는 술집에 앉아, 미래에게 소주를 따라줬다. 미래는 언제나 내가 답하지 않은 것을 다시 묻지 않았다.
“채햄 선배, 왜 오늘은 좋은데이가 아니라 시원 먹어요?”
하지만 미래는 한번 물은 것을 다시 묻지 않는 장점을 잊게 할 만큼 많은 것을 물었다. 내가 지금부터 미래에게 할 이야기는 적어도 2.6도 정도 더 독할 필요가 있었다. 좋은데이는 16.9도, 시원은 19.5도.
나의 열아홉과 스물을 공유했던 그 겨울은 12월까지는 춥고, 1월은 쌀쌀했고, 2월부터는 춥지 않았다. 그 당시 나에게 스무 살이 된다는 것은 피시방에서 밤을 샐 수 있다는 것이었고, 더 이상 뚫리는 술집만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당당하게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고, 목숨을 걸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학교 담을 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들로 그 겨울이 춥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내가 시골주막에 처음 간 것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문예창작과의 신입생환영회가 있던 날이었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신입생이었던 나는 동기 세 명과 학생회장이던 06학번의 영란 누나, 그리고 이제 막 복학한 05학번의 정훈 선배와 함께 시골주막에 들어갔다. 시골주막은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을 만큼의 크기를 가진 아담한 술집이었다. 사장님은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계산을 했고, 그의 아내는 술집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주방에서 전을 굽거나, 탕을 끓였다.
시골주막 중앙에는 단체 손님을 위해 4인용 테이블 세 개 정도를 붙여 놓은 자리가 두세 자리 정도 있었고,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그 주위로 몇 개가 있었다. 주방이 있는 편의 다른 모퉁이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조금 좁게 앉으면 여덟 명에서 열 명까지 앉을 수 있었다. 방에는 P대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낙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우리는 영란 누나를 따라서 그 방에 들어가 앉았다. 영란 누나는 ‘일단 만원의 행복 세트 하나 시키고, 아 여기는 메뉴판에 없는 메뉴가 하나 있디. 막걸리 무한리필. 마음껏 무라, 우리 새내기들!’이라고 얘기했고, 작은 목소리로 ‘여기 사장님 진짜 잘 생겼디. 한석규 닮았다. 느그 한석규 아나?’라고 덧붙였다. 정훈 선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 한석규.’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지나자 정말 한석규를 닮은 사장님이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밑반찬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양념된 콩나물과 깍두기를 가지고 왔다. 목소리나 억양은 한석규와 닮지 않았지만, 항상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사장님의 말투는 ‘안녕하세요, 한석귭니다.’만큼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홍합탕과 김치전, 계란말이 같은 안주들이 나오고 영란 누나의 주도에 따라 몇 번의 건배가 계속 됐다. 미래는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에게 물었다.
“채햄 선배 동기들은 누구? 나도 아는 사람인가?”
나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미래에게 말했다.
“손미래. 좋은데이 16.9도, 시원 19.5도. 몇 도 차이고?”
미래는 잠시 내 어깨 위에 공책이라도 있는 듯 바라보며, 시원과 좋은데이의 차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미래의 입에서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지금 시곗바늘이 여덟시 언저리에 머물러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이십, 아니 이점육! 나 취했나, 왜 계산이 안 되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수애는 술을 마시면 숫자에 관련된 게임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영란 누나는 그걸 알아채고, 계속 구구단을 외웠다. 수애가 연거푸 막걸리를 세 잔 정도 들이키자, 조금 미안했던지 누나는 흑기사를 요청했다. ‘흑기사 누가 할래?’라는 누나의 물음에 나는 손을 들었다.
“저요!”
그와 동시에 내 옆자리에 있던 따거, 그러니까 한열이 형도 손을 들었다. 한열이 형은 같은 신입생이지만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한열이 형의 부모님이 일 때문에 중국으로 가면서, 여차저차 수능을 일 년 늦게 친 것이다. 그때 한열이 형은 동래에서 중국집을 하는 삼촌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데, 주말이면 자신의 스쿠터를 타고 가끔 배달을 도왔다. 한열이 형은 재수학원에서 자신의 별명이 ‘따거’였다고 했다. 따거는 중국말로 형, 큰 형 같은 뜻이라고 한다. 마침 재수생이 거의 없었던 문창과 08학번 남자 중에서는 한열이 형이 제일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한열이 형을 따거형이라 불렀다. 그건 채햄 선배만큼 바보 같은 호칭이지만, 그냥 따거형은 따거형이었다. 미래는 ‘따거’를 중얼거리며, 내 술잔에 마지막 남은 술을 따랐다.
“어, 다 먹었다. 이모! 여기 시원 한 병 주세요. 채햄 선배, 그래서 누가 흑기사 했어요?”
수애는 신입생 여자들 중에선 유일하게 시골주막까지 간 친구였다. 수애는 자신이 이름으로만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자신을 소개할 땐 항상 최수애라고 불러달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처음에는 수애의 부탁을 따랐지만, 수애와 가까워진 뒤로는 ‘수애야, 그 해 여름은 어땠노?’, ‘수애야, 우리 둘 다 벚꽃 필 때까지 연애 못하면 우리끼리 4월의 키스하자.’ 같은 장난을 쳤다. ‘그 해 여름’과 ‘4월의 키스’는 배우인 수애가 나왔던 작품들이었다. 그때마다 수애는 제법 아플 정도로 나를 때렸지만, 나는 장난을 그만두지 못했다. 항상 그럴 때면 수애의 눈이 눈썹을 밀어내는 새침한 표정과 감은 눈 위로 밀려드는 눈썹이 짓는 웃음, 그리고 잔잔한 물결 같은 입술 위에 떠오르는 미소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애를 처음 만난 날은 몰랐던 모습들이었지만, 나는 흑기사를 자청하며 손을 들었다. 그건 파도가 밀려오고, 바다가 백사장에 스며들고, 다시 모래를 쓸어가서, 모래가 다시 바다에 물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따거형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미래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일어났다. 미래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미래는 돌아오자마자 자기 잔을 비웠다.
“나갔다 오니까, 술이 조금 깨는 것 같아. 그래서 채햄 선배가 대신 마신 거예요?”
영란 누나는 나와 따거형이 동시에 수애의 흑기사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무척 신나하는 눈치였다. 누나의 익숙한 진행에 따라 나와 따거형은 채워진 술을 비우고, 잔을 들고 수애의 선택을 기다렸다. 사실 흔한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땐 수애의 선택이 끝나고 내 술잔이 비어있다면, 마치 세상이 텅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다행히 수애는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을 마시면서 나는 ‘시골주막 막걸리는 진짜 맛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수애는 벌칙으로 노래를 불렀다. 말할 때 수애의 목소리는 털털한 그녀의 성격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노래할 때의 목소리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습이 낯설지는 않았다. 맑은 날의 바다와 비오는 날의 바다는 서로 다르지만, 두 바다가 같은 바다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수애의 노래는 비오는 날의 바다처럼, 떨리면서도 그침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수애의 노래였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후렴구는 나도 알고 있는 노래였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 함께 살던 삼촌이 술에 취해서 부르던 노래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지금까지도 스무 살이었던 수애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왜 하필 그 노래를 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수애가 차라리 소녀시대의 ‘키싱유’ 같은 노래를 불렀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스무 살에 ‘서른즈음에’를 부르기에는 앞으로 더 멀어져 갈 날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평생 ‘서른즈음에’의 노랫말에서 한 뼘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미래는 더듬더듬 내가 미처 부르지 못한 수애의 뒤를 이어 후렴구를 불렀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이거 채햄 선배한테 많이 들었어. 이게 언제 나온 노래죠?”
나는 미래가 부르지 않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를 두 번이나 삼키며 말했다.
“1994년일 거야.”
수애의 노래가 끝나고, 영란 누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으로 시작하는 후렴구를 불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앉아 있는 방 바깥의 어디서도 그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그건 꽁치가 익는 냄새였는지 모른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사장님이 ‘서비습니다. 꽁치구이 나왔습니다.’라며 꽁치구이를 들고 왔으니까. 따거형은 꽁치를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먹으며 물었다.
“이거 누구 노랜데요?”
“김광석 ‘서른즈음에’요. 1994년일 걸요? 이게 마지막 정규 앨범이에요. 그때 김광석이 만으로 딱 서른이었어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명석이가 따거형의 물음에 답했다. 당시 명석이의 머리는 상고머리를 그대로 길러서 옆머리가 붕 떠 있는 상태였다.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던 명석이는 우리나라의 옛날 노래와 팝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한번 들은 사소한 일들을 잘 기억했다. 명석이는 잠자코 있다가 ‘그 때가 몇 년일 거야.’로 자신의 기억들을 풀어 놓았다. 가끔 정말 쓸데없는 지식도 많아서 우리는 명석이를 ‘기억의 오지랖이 넓은 놈’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때 명석이의 말은 어떤 울림이 있었다. 오 년이 지난 지금도 ‘마지막’과 ‘딱 서른’이 주는 울림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만 나는 그날 집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취해버렸다. 다음 날, 나는 휴대폰 벨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영란 누나였다. 신입생환영회 다음 날은 수강신청이 있는 날이었다. 문예창작과는 학교에서 선배들이 수강신청을 도와주는 전통이 있었다. 당연히 학교에서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 줄 알았던 나는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부랴부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이 교대 앞을 지나면서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이미 부재중 전화가 액정 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 와 있었다. 언제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는지, 그 중에는 수애와 명석의 이름으로 온 전화도 있었다.
그날 우리, 그러니까 그 전날에 술집에 있었던 네 명의 신입생들은 결국 수강신청에 실패했다. 선배들은 우리를 ‘수포’라 불렀다. 우리가 네 명이기도 했고, ‘수강신청을 포기한 사람들’의 줄임말이기도 했다. 수강신청에 늦게 된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문예창작과 신입생 정원 열다섯 명 중 남자가 다섯 명이었는데, 그 다섯 명 중에 세 명이 같은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세 명 사이에 유일한 여자인 수애가 있었다.
“어 술 다 떨어졌다. 더 시킬까요? 다른 데 갈 거예요?”
미래는 술병을 들어 술이 남았는지 확인하며 말했다.
“그만하고 2차나 가자.”
우리는 전주막걸리에서 나와 북스리브로가 있는 골목으로 걸어갔다. 이제 3월인데도 얼어붙은 날씨는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채햄 선배, 봤어요? 좀 있으면 북스리브로 문 닫는데요. 2차는 어디로 가요?”
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순환이 빠른 대학가다 보니, 무엇이 없어지는 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익숙한 것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나 술에 취하면, ‘오랜만에’란 말을 안주처럼 곱씹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그때의 내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오랜만에 언들막이나 가자.”
멈추지 않는 빗줄기와 같은 모진 시간의 장마 속에서 살아남은 장소들이 있다. 내가 미래와 함께 술을 마시는 ‘전주막걸리’와 ‘언들막’이 그랬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쏟아지는 시간의 흐름을 피하기 위해 그런 곳에 들르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수포 멤버들은 1학기 내내 그런 곳에서 만났다. 모두 함께일 때도 있고, 따거형이 배달 때문에 바쁠 때면 셋이서 볼 때도 많았다. 우리의 술자리는 전주막걸리나, 언들막에서 시작했지만, 항상 끝은 시골주막이었다. 우리에게 시골주막은 마침표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이 마침표 없는 문장처럼 불편했다. 그럼에도 나는 술을 마실 때면 시골주막에 가는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익숙한 길을 밟다가 결국 수몰된 고향을 마주하는 사람처럼, 그런데도 바보처럼 그 길을 또 걷는 사람처럼.
언들막에 들어가 안주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나는 미래에게 말했다. 어쩌면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가 비를 피했던 곳은 원두막이 아닌 언들막인지도 모른다고. 황순원의 고향은 평남 대동이었다. 평남 사투리로 언들막은 원두막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가 피했던 것은 단순한 소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소나기처럼 갑작스러운 일이니까. 어른이 되는 것은 그만큼 순수함과 한 발 이별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것은 그날 수애는 내게 했던 얘기였다.
“그래서 소녀는 그렇게 말했는지 몰라. 입었던 옷을 같이 묻어달라고 말이야. 시간 많이 늦었다. 이제 마무리 해야지? 시골주막 가자.”
그날, 나는 수애와 처음으로 단 둘이서 술을 마셨다. 북스리브로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는 서점에서 나오는 길에 비를 맞았다. 홀딱 젖은 채로 언들막에 갈 것을 제안한 것은 그녀였다. 옷이 마를 무렵 우리는 다시 비 오는 거리로 나왔다. 다시 비를 맞았을 때는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막 5월이 되던 날이라 비를 맞기에는 아직 쌀쌀했다. 시골주막 방안에 앉아서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시골주막의 사장님은 ‘오늘은 두 분만 오셨네요.’라고 말하며, 방안에 보일러를 틀어주었다.
“명석이라도 부를까?”
침묵이 싫었던 나는 그런 멍청한 말이나 하고 말았다. 수애는 그런 나를 보고 한참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명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애의 휴대폰에서는 오래된 팝송 같은 통화연결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화 안 받는데?”
수애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제대로 닫지 않아서인지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수애도, 나도 그 노래를 멈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앉아있었다. 바닥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따뜻했던 방 때문이지, 아니면 마신 술 때문인지 축축했던 기분이 촉촉해졌다. 수애가 또 웃으면서 말했다.
“야, 채희담. 니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한데?”
계산하고 나가는 길에 갑자기 사장님의 아내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학생! 아직 비오니까, 우산 들고 가. 하나 밖에 없는데 괜찮지? 그거 비싼 거니까 다시 갖다 줘야 해.’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우산을 받아들었다. 이제 비는 가로등 아래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먼저 시골주막 밖으로 나가서 우산을 펼치고 수애를 기다렸다. 수애는 대뜸 내 팔을 붙잡으며,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에게는 내리는 빗방울보다 수애가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비를 맞는 것보다 수애에게 닿는 것을 걱정하며 한참을 굳은 몸으로 걸어갔다.
“야, 비 안 온다. 맑다!”
나는 갑작스러운 수애의 말에 화들짝 놀라 ‘어, 어 맞나?’라는 말 따위를 뱉으며 우산을 접었다. 머리 위에 닿는 빗방울이 느껴졌다. 그리고 웃으며 내 팔에 와 닿는 수애의 손도 느껴졌다. 나는 다시 우산을 펼쳤다. 여전히 수애는 내 팔을 때리며 웃고 있었다.
“채희담 이 바보야! 우산 봐라.”
우산의 안쪽 면은 맑게 갠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부산레포츠 근처에 있는 수애의 자취방에 수애를 데려다 주고, 나는 가까스로 지하철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손에는 우산 손잡이 자국이 빨갛게 나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새까만 문자 창에 ‘오늘 재밌었다. 잘자’라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잘자’라고 썼다가 다시 지웠다. 그동안 벌써 지하철은 내가 내려야 할 양정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결국 나는 수애에게 ‘잘자리ㅋㅋㅋ’라고 문자를 보냈다. 지하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비는 그쳐있었다. 서둘러 우산을 폈다가 접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내가 우산을 지하철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내가 시골주막에 우산을 돌려준 것은 6월 말이었다. 인터넷을 한참을 뒤져 겨우 똑같은 우산을 살 수 있었다. 시골주막에 들른 나는 겸사겸사 해서 명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라 친구들을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석이의 통화연결음은 바뀌어 있었다. 명석이와 함께 시골주막에서 술을 한참 마시고 있을 때 따거형도 연락을 받고 나왔다. 수애 없이 우리들끼리 술을 마신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얘기 들었나?”
시골주막에는 우리밖에 없었는데, 명석이는 소릴 죽여 말했다. 정훈 선배와 영란 누나가 결국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술에 취했는지, 따거형은 그 말을 듣고 지금이 연애할 때냐고 화를 냈다. 따거형은 한참 뜨거웠던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따거형은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와서 광우병으로 우리가 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한가하게 연애질이냐며 둘을 비난했다. 따거형의 이야기는 결국 명석이와 나도 촛불집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으름장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 당시 내 삶의 가장 큰 문제는 광우병이 아니었다. 나는 따거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석이에게 물었다.
“니 지난달에 컬러링 뭐였노?”
명석이는 ‘1969년에 나온 비지스의 <First of May>였지. 이 노래는 말이야…….’로 말을 시작했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건 명석이가 읊조리던 노래의 가사였다.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we used to love while others used to play.
나는 작은 아이였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커보였을 때,
다른 아이들이 노는 동안 우린 서로 사랑했었죠.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왜냐고 묻지 말아요. 하지만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고,
또 누군가가 멀리서 다가왔으니.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이제 우리는 컸고, 크리스마스트리는 작아 보이지만,
당신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네요.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but guess who'll cry come first of May.
하지만 당신과 나, 우리 사랑은 시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오월의 첫날이 오면 누가 눈물짓고 있는지 생각해 주세요.
The apple tree that grew for you and me,
I watched the apples falling one by one.
당신과 나를 위해 심었던 사과나무 아래서
난 사과가 나무에서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는 걸 보았죠.
And I recall the moment of them all,
the day I kissed your cheek and you were gone.
그리고 난 그 모든 순간들을 떠올려 봐요.
당신의 뺨에 입맞춤 하던 날과 당신이 숨어버린 날을.
나는 수애와 함께 비를 맞던 그날의 이야기를 따거형과 명석이에게 하고 말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따거형은 우리 앞에서 처음으로 담배를 폈다. 나는 따거형이 문 담배의 깜빡이던 불빛에서 촛불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따거형은 담배가 타기 무섭게 다시 촛불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술잔을 비우더니, 나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우리는 그날 싸우듯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것으로 진심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던 나이였다. 미래는 더 이상 그렇게 무모할 필요 없다는 듯 술잔을 드는 내 손을 붙잡았다.
“채햄 선배, 조금만 천천히. 그러니까 무슨 진심 말하는 거예요?”
글쎄, 그건 모르겠다. 따거형은 분명 촛불을 말했고, 나는 수애를 말했다. 시골주막이 문 닫을 시간이 되자, 우리는 시골주막을 나와서 영원교회에 들어갔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문이 열려있었다. 가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들리곤 했지만, 취해서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우리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따거형은 고함을 치듯 노래를 불렀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불어온대도’ 텅 빈 예배당에 따거형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도 질세라 소리쳤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명석이도 조용히 있지는 않았다. ‘And I recall the moment of them all, the day I kissed your cheek and you were gone’
우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아침이 된 뒤였다. 우리는 예배당의 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는, 떨어지지도 않고 얌전히 자고 있었다. 새벽기도를 끝낸 목사님은 우리에게 담요를 덮어두고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 아직 술이 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날의 기억은 나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다. 도망치듯 교회를 빠져 나오고, 뜨거워져가는 햇빛의 강렬함에 눈을 찌푸리고, 우리는 드리우던 십자가의 그림자에 못 박힌 것처럼 잠시 멈춰 서고, 그때 느꼈던 초여름의 바람.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리다가, 지쳐 바닥에 주저앉고는 또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웃었던 우리 셋.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대학교 1학년 1학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다시 수애와 단 둘이 술을 마시게 된 것은 8월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방학 때 잠시 고향인 대구로 돌아갔던 수애는 길었던 머리를 자른 채 나타났다.
“너무 더워서 잘랐는데, 자르고 나니까 너무 시원하데. 근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 머리가 이렇게 짧은 적이 처음이었거든.”
수애는 시골주막에 앉아서 그렇게 말했다. 여름이 되자, 시골주막에서는 편의점에 있는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을 가게 앞에 내어 두었다. 모여드는 모기를 쫓으며, 우리는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나는 중앙운동장이 공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말했고, 수애는 대구의 숨 막히는 더위에 대해서 말했다. 부산도 계속되는 열대야로 밤에도 후텁지근한 기운이 남아있었지만, 가만히 있는데 땀이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애는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맺은 채, 뜨거운 홍합탕 국물을 후후 불면서 떠먹고 있었다. 가만 보니 이전보다 약간 마른 것 같았다.
“야 최수애. 니 살빠졌나?”
수애는 잠시 숟가락을 들고는 ‘뭐’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짧아진 머리 사이로, 수애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수애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후텁한 공기 사이로 한 줄 서늘한 바람이 등에 와 닿았다. 수애의 손이 닿은 내 손만 빼고는 온몸이 차가워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내 손에서 숟가락을 빼서는 엄지 위에 살포시 올려놨다.
“애도 아니고, 누가 숟가락질을 이렇게 하노? 그만 먹고, 영화 보러 가자.”
나는 수애를 따라서 난생 처음 DVD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애는 DVD를 진열해놓은 곳은 보지도 않고, 곧장 카운터로 가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틀어 달라고 했다. 직원이 안내한 방에 들어가서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조용함 속에 있으니, 에어컨, 공기청정기 같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나는 8월 25일이 되면, 무조건 이 영화를 보거든……. 올해는 특별히 니랑 같이 보는 거다.”
웅성대는 기계음 사이로 평소와는 다른, 하지만 언젠가 들은 적이 수애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 목소리를 언제 들었나 생각하는 동안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애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비오는 날 우산 속에서처럼 굳은 몸으로 한 시간 반 동안을 멈춰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 목소리가 수애가 노래할 때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비를 맞은 날처럼 내 어깨 한편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수애가 자취방에 들어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손가락에 밀려오는 아른한 아픔과 어깨에 머물렀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평생 간직하게 될 수애의 무게감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수애와 자주 만났다. 함께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책을 읽고, 노트북을 들고 나와 글을 썼다. 한번은 심견우 교수의 ‘소설 창작 입문’ 과제를 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정오부터 자정까지 시골주막을 관찰한 적도 있었다. 나는 시골주막에서 사장님을 도왔고, 수애는 주방에서 사장님의 아내를 도왔다. 함께 일하게 되면서 사장님 부부가 우리와 열두 살 차이의 동갑내기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가장 큰 사촌형보다 나이차가 적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사장님을 형님이라 부르고, 사장님의 아내를 형수님이라 불렀다. 형수님의 배가 불러오고 있다는 것을 안 것도 그때였다. 형님은 내년 3월이면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 말했다.
그 무렵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부가 함께 지내고, 배가 불러오고, 아이를 낳는 것. 시골주막에서 만원으로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 모습을 내 삶에 투영하고 있었다. 그 장면 속에 형님과 형수님 대신 나와 수애가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상상 말이다. 그때 수애의 생각까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린 같은 풍경들을 보고 있었다. 미래가 물었다.
“그럼 채햄 선배랑 수애 언니랑 사귄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수애도 나도. 좋아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우리는 한 번도 서로에게 한 적이 없었다. 수애는 몰라도, 나는 사실 솔직히 그런 말들을 입에 담아두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할 수 없었다. 2009년 1월 6일, 나는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 스물한 살은 세계의 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좋아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그리고 내년 1월 6일에 군대에 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다.
내가 수애와 마지막으로 시골주막에 간 것은 크리스마스를 이삼일 앞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산책 중이던 나는 열시가 넘어서 수애의 전화를 받았다. 수애는 약간 취해 있었다. 내가 시골주막에 도착하자, 수애는 혼자 방에 앉자 울고 있었다. 나는 수애를 일으켜 세웠다. ‘계산은 벌써 끝났어.’ 시골주막의 형님이 나에게 말했다. 밤거리로 나오자 급하게 지나쳐서 보지 못했던 거리는 크리스마스 준비로 한창이었다. 영원교회도 작은 전구들과 크리스마스트리로 반짝거렸다.
수애는 교회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아마 눈물이 그치길 기다린 모양이다.
“희담아, 안아줄래?”
나는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그녀의 떨림이 멈추길 기다렸다. 그것 역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애는 눈물을 닦고 싱긋 웃었다. 가슴팍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 웃음은 그녀가 온 힘을 다해서 지켜야 할 무언가가 분명했다. 그리고 잠깐, 정말 아주 잠깐. 나 역시 그 웃음을 함께 지켜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일주일 뒤인 12월 30일. 수애와 나는 여행을 떠났다. ‘우린 스무 살이니까, 뜨는 해가 기다려지기 보단, 지는 해가 아쉽지 않을까?’ 버스터미널에서 수애가 말했다. 우리는 부산에서 버스로 갈 수 있는 가장 서쪽을 찾아보았다. ‘진도가 좋을 것 같다.’ 내가 말했다. 우리는 진도로 가는 버스표를 사려했지만, 진도로 가는 차편은 하루에 한 번 밖에 없었다. 낙담한 우리들에게 매표소 직원은 해남으로 가는 차를 타면 된다고 했다. 해남에서는 진도로 가는 차가 자주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해남에서 진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나는 명석이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나는 한참을 추스른 후에야, 명석이의 말을 수애에게 전해주었다. ‘놀라지 마리. 명석이한테 전화왔는데 따거형이 교통사고 났단다. 일주일 전쯤, 학교에서 술에 취해서 스쿠터를 타고 집에 갔는 갑다. 병원에 누워 있는데, 의식이 안 돌아왔데. 어쩌면 평생 안 돌아올지 모른다네.’ 수애는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커피를 사오겠다며 일어났다.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수애는 웃으며 나에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차 시간이 다가오자, 걱정이 된 나는 수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수애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낯선 땅 끝에서 나는 수애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더 이상 걷지 못할 때부터, 진도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끊길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 수애는 이제는 과거가 된 나의 미래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나는 스물한 살이 되었다. 입대를 하루 앞두고, 명석이와 나는 시골주막에 마주 앉아서 술을 마셨다. 명석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수애 아직도 연락 안 되나?”
나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희담아, 니 수애한테 군대 간다고 말했나?”
명석이는 나의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이상하제. 따거형이 술 마시고 스쿠터 탈 사람이 아닌데.”
나는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골주막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저 군대에 가요.”
시골주막 형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님. 저 군대에 간다구요. 형님, 저 군대 간다구요. 군대……. 형, 아 욕 나올 것 같은데, 형수님 뱃속에 아기가 들으면 안 되니까. 죄송합니다, 형수님. 아 저 군대 간다구요. 형……. 형! 저 군대…….”
바닥에 쓰러져서 우는 나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시골주막이었던 부동산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 미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아마 그때 뱉지 못한 욕일 것이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한번 있었다.
2010년 1월 늦은 일병 정기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명석이와 만나서 술을 마셨다. 명석이는 지하철에서 공익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따거형과 수애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술에 취해서 시골주막에 가기 전까지 나는 정말 괜찮아 보였다. 언들막에서 명석이는 시골주막에 가자고 하는 나를 말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고, 키나 덩치가 훨씬 컸던 나를 명석이는 말릴 수 없었다.
익숙한 골목을 비틀거리며, 영원교회 앞을 지나던 나는 시골주막이 있던 자리를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뒤따라오던 명석이가 나를 붙잡았다. 시골주막은 외피만 남긴 짐승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아직 공사 중인지 문 앞에는 시멘트를 발라 놓았고, 들어가지 못하게 띠를 둘러 두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하고 말았다.
“명석아……. 명석아……. 씨발!”
명석이는 지쳤다는 듯, 공사 중인 건물 옆에 있는 턱에 걸터앉았다.
“내가 가지 말자고 했잖아.”
나는 명석이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뭔데? 이게 뭐냐고? 씨발!”
명석이는 한참을 끌려가더니, 나를 밀었다. 나는 바닥에 형편없이 넘어졌다. 밤하늘은 그냥 충실하게 검기만 했다. 나는 울음 같은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그런 노래. 한번 터지면 계속 흘러나오는 그런 노래.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같은 그런 노래.
“그만해라. 그만해라고! 그런다고 수애가 나타나나? 따거형이 깨어나나? 시골주막이 다시 생겨나나? 병신아, 그만해라고!”
명석이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우리는 바보같이 울고 있었다. 나는 길바닥에 누워서, 명석이는 부동산 옆의 굳게 닫힌 카페 문에 기대서.
“명석아 씨발.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이별하며…….”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영원교회에서 누군가 나와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목사님이었다.
“느그 오늘 교회에서 자고 가라.”
그날이 명석이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명석이는 공익 근무를 하며 틈틈이 수능을 준비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한 명문대에 들어갔다. 서울로 떠난 명석이는 처음에는 간간이 연락을 해왔지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명석이의 문자를 끝으로 명석이와의 연락도 점점 뜸해져갔다.
“채햄 선배!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왜 그렇게 누워 있어요. 으이구!”
미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누워있었던가. 듣고 보니 하늘이 보인다. 밤하늘 사이로 전선이 얽히며 지나간다. 꼭 오선지 같다. 전선 위로 틈틈이 별이 음표처럼 웅크린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서른즈음에’인가, 아니 ‘First of May’구나. 아니다. ‘바위처럼’. 어쩌면 소녀시대의 ‘키싱유’일지도. 알 수 없는 노래 사이로 서늘한 바람처럼 미래의 목소리가 등 뒤에 와 닿는다.
“채햄 선배. 시원 19.5도 아니던데. 19도던데. 언들막 아저씨한테 그거 물어보는 사이에 없어졌어요. 작년부터 영점오 도 낮아졌데요.”
어쩐지 독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래의 서울말이 영점오 도만큼 부드럽게 넘어간다.
“채햄 선배 듣고 있어요? 괜찮아요?”
미래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미래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래의 눈이 커진다. 눈썹이 밀려난다. 미래의 뒤로 달이 보인다. 어디선가 달이 바다를 밀어내고 있겠지. 달이 줄어들고, 미래의 눈썹이 눈에 가까워진다. 파도가 치나. 어디선가 바닷물이 한 방울 입에 닿았다. 미래가 울고 있었다.
“왜 울고 있어요. 채희담, 왜 그러고 누워서 울고 있냐고…….”
니가 울잖아 바보야.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웃음을 지어본다. 미래가 따라 웃는다. 이런 문디 가스나, 취했나 보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되는데……. 그런데 울다가 웃는 미래가 너무 자연스럽다. 달이 다시 바다를 밀어내고, 바다는 땅에 스미고, 다시 달이 바다를 부르고, 땅이 바다에 물들고, 미래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문득 손을 펴고 손바닥을 본다. 우산을 꼭 쥐었던 빨간 자국은 이제는 없다. 쓸려간 것일까. 수애가 고쳐 쥐어준 숟가락이 누르던 엄지도 아프지 않다. 미래가 나에게 오고 있다. 나는 잠시 멈춰 선다. 어깨가 촉촉해졌다. 나는 휘청거리는 미래를 붙잡는다. 머리 위로 전선을 타고 노래가 지나간다. 점점 노래는 멀어진다.
마지막으로 시골주막이 있던 자리를 돌아본다. 그리고 잠깐 우리를 돌아본다. 시골주막 형님의 아기는 딸일까 아들일까. 형님을 닮았을까 형수님을 닮았을까. 어쨌든 지금쯤 네 번째 생일을 맞이했겠지. 시골주막에서 다섯 살 배기 아이가 뛰어 나오다, 넘어진다. 아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을 짚고 일어선다. 아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달이 아이를 따라온다. 어디선가, 바다가 모래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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