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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소설]흡혈귀는 누구인가?

들림 2013. 4. 10. 10:43
흡혈귀는 누구인가
- 김영하「흡혈귀」감성평론 -


김경준

  간혹 일상의 다양한 상황들이 연출한 것처럼 맞아 떨어지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비가 오고 해가 졌는데도, 이상하게 하늘은 노란빛으로 밝았다. 골목은 고요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야채 트럭의 호객 행위, 흔히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만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만 언뜻언뜻 들릴 뿐이었다. 비가 오는 탓에 스쿠터를 학교에 세워두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지루한 일상으로 무기력한 나의 마음에 비처럼 피로가 쏟아져 온몸에 동심원으로 퍼져나가는 듯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고독이었지만, 마음 놓고 즐기기에는 너무나 섬뜩한 침묵이었다. 비 내리는 저녁과 지루한 일상의 팽팽한 균형을 깨뜨린 것은 유난히도 크게 들렸던 휴대폰의 진동소리였다.

  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전화를 받고 이내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겠지만, ‘김경준씨 폰 맞나요라는 그의 묵직한 저음 뒤에 한동안 이어진 빈 전화음은 누구세요라는 나의 물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비로소 야 김경준 이 자식 오랜만이다라는 그의 말이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하던 지루한 일상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진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5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못했다. 사실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서로를 찾고 안부를 묻는 것을 금기했다. 그때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 사건은 아무리 잊고 싶어도 술에 취하거나, 잠결에 불현듯 나의 무장을 해제하곤 했다.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가끔 삶을 침범하는 기억은 언제나 원치 않는 기억일 것이다. 그런 기억을 추억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서로의 존재만으로 불쾌하게 나의 상처를 헤집고 들어오는 기억을, 진수는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나의 상처를 벌려놓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 역시도 마치 뱀에게 목이 감긴 사람의 구조요청처럼 필사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표면은 경준아 공쳄 기억하지?’라는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의례 회상에 동참하자는 어조였다.

 

  어떻게 공쳄을 잊겠는가. 고등학교 3학년. 한참 수능에 대한 압박과 진학에 대한 불안이 극에 달아있을 시절. 공쳄은 우리의 돌파구였고, 미스터리한 것들을 실제로 마주함으로써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노력이었다. 어쩌면 공쳄은 우리의 가장 빛나는 추억이 될 수도 있었다. 함께 어두운 곳을 헤매며 끈끈하게 우정을 다지고 서로의 공포를 어루만져 껴안아 줄 수 있는. 때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모험담처럼 늘어놓을 수 있는 그런 추억 말이다.

  공쳄은 한 윤리 선생의 농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윤리 선생이면서도 철학보다 성악에 더욱 관심이 있었던 그의 수업은 노래 반, 농담 반에 가끔 시험기간이면 교과서의 활자를 흩는 수준인 교과지식의 조합이었다. 그날처럼 비가 오던 날.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겪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새벽이면 산에서 발성연습을 하는데, 한참 소리를 지르고 있으면 어느 할머니가 다가와 그에게 길을 묻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항상 산을 올랐고, 이 시간에 산을 오르는 할머니가 걱정된 그가 할머니가 간 곳을 따라가면 절벽이 나온다는 대목에 이르자 아이들은 너무나 상투적인 그의 이야기 전개에 야유를 보냈다. 조금 당황한 선생은 니들이 실제로 가보면 할머니를 볼 수 있을 거라며, 못 믿으면 실제로 가보라는 유치한 말을 했다.

  물론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 진짜 갈까싶어 한 말이겠지만, 공부에 지친 우리들에게 그의 말은 이상하게 자극이 되었다. 같은 날, 야간자율학습시간. 언제나 탐정소설과 공포소설에 빠져있었던 진수가 정말로 그 산에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진수와 친했던 나는 겁이 나면 빠지라며 아이들을 도발했다. 그런 무모함이 남자다움처럼 느껴졌던 시절, 꽤 많은 아이들이 그 제안에 응했다. 하지만 만나기로 한 다음 날 새벽 3. 결국 그 자리에 모인 것은 진수와 나, 그리고 은현이었다.

  은현이가 그 자리에 온 것은 조금 의외였다. 진수야 워낙 활발하고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아이였고, 나 역시 호기심이 강한데다 뱉어놓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현이는 달랐다. 흰 피부에 내성적인 성격인 그는 언제든 눈에 띄는 법이 없었다. 보통 잘생기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빠지기 마련인 나르시즘도 그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매번 전교 3등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범생이지만, 선생들 역시 그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구석에서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업시간에는 항상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흐릿한 눈빛으로 앉아있었고, 쉬는 시간이면 늘 엎드려 잠을 잤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런 그에게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다크템플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다크템플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계 종족이었다.

  산에서 돌아온 뒤, 나와 진수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무용담을 떠벌렸다. 나는 그 체험을 아이들에게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다른 이야기보다 내 경험이 바탕이 된, 무서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에 집중했고, 항상 우리들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런 영웅심리에 도취된 나와 진수는 다음 모험을 계획했다. 말을 줄이는 것이 유행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지던 시절, 우리는 모임의 이름을 공포체험을 줄인 공쳄이라고 지었다. 우리는 또래 고등학생이 농구골대에 목을 맨 학교,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던 주차장, 의문의 사망 사건이 있었던 남포동의 낡은 극장들을 돌아다니며 미스터리의 실체를 밝히려 애썼다. 여러 아이들이 모임에 참가했다가 빠지기도 했지만, 언제나 나와 진수, 은현이는 공쳄의 주축에 있었다. 우리는 미스터리의 실체가 아무 것도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를 억누르던 불확실성의 중압감을 떨쳐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우리에게 불확실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수는 나에게 파일을 보내면서, 그의 작업을 속죄라 표현했다. 내가 그 사건을 잊으려 다른 일에 몰두하는 동안, 그는 5년 동안 그 죄책감과 정면대결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흡혈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끝없이 증명하려 했다. 여러 과학적 조사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그가 마지막에 기댄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여러 문학에서 등장한 흡혈귀들의 실체를 끝없이 탐구했다. 그러나 흡혈귀를 쫓던 그가 마주한 것은 작가나 그들의 추악한 내면이었다. 그들은 공포를, 욕망을, 연민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흡혈귀를 사용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흡혈귀를 문학으로 재현한 작품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김영하의 흡혈귀를 읽게 되었고,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흡혈귀의 실체를 추적하게 된 것이다.

  그가 보낸 첨부파일을 열기 전 가장 먼저 드는 걱정은 우리 문학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해프닝 중 하나로 그가 기록되는 것이었다. 김정한은사하촌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소설이 범어사를 배경으로 했다고 생각한 세력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그 때문에 상금 절반을 반 이상 치료비로 썼다는 웃지 못 할 사건이었다. 그런 일은 번번이 있어왔다. 이문열은영웅시대가 성공하여 드라마화 되자 친척들의 전화 세례를 받았다. 비단 소설만의 일이 아니었다. 많은 교육현장에서 화자인 는 곧 시인으로 번역되어 아이들에게 소개되고는 했다. 문학과 현실을 착각하는 오류들. 그 역시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었다.

  진수가 보낸 파일은 A4 용지 10장 정도의 두서없는 글들로 되어있었다. 날짜를 알 수 없는 일기와 신문기사들, 시집과 평론집에서 인용한 대목들. 이 모든 자료들은 어느 소설과 한 시인에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그건 일종의 비평이었다. 김영하의 흡혈귀를 역사전기주의로 분석한 그의 문체와 구성은 거칠었지만 방대한 자료만큼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절대로 세상에 등장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한 시인의 실명이 거론되어 있었고, 그의 사생활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파헤친 탓이었다. 나는 그 파일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진실이었다. 따라서 나는 과제를 핑계로 그의 파일과 그가 나에게 요청한 도움(이 역시 어떤 비평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날의 사건에 대해 고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서술함에 있어서, 일종의 가공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의 글을 처음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자료들과 주장에 대한 연관관계와 논리 전개 자체가 복잡한 부분이 많았다. 또한 일기 형식으로 되어있는 그의 글들이 시간 적으로 뒤죽박죽 섞여있기 때문에 나로서도 두 세번은 읽어보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탐색 과정을 시간 순으로 재배열했고, 인용에 들어간 자료들의 출처를 찾아 일일이 밝혔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에는 주를 달아 보완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틀에 있어서는 다소 문장이 조악한 면이 있지만 그대로 두었다. 거친 그의 문장이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주석을 단 부분은 (원주)라고 밝혔고, 나머지는 모두 내가 보충하기 위해 단 것이다.

 








흡혈귀는 누구인가?[각주:1]

 

 

  어두운 밤. 거대한 자작나무 숲, 한 여자가 홀로 걷고 있다. 여자의 시선은 어둠에 쫓겨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혼란스럽다. 오래된 고목에서 누군가 여자를 지켜보고 있다. 낯선 이의 시선을 의식한 듯, 여자의 걸음은 빨라진다. 그 때 여자의 눈앞에서. 무언가 치솟는다. 기분 나쁜 괴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희미한 달빛을 가린다. 깜짝 놀란 여자는 주저앉는다. 박쥐다. 여자는 안심하고 다시 일어나 옷을 턴다. 그때, 뒤에서 어둠이 여자를 껴안는다. 여자의 하얀 목덜미에 핏방울이 두개 맺힌다. 숲은 이제 완벽한 어둠이다.

 

  흡혈귀.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빨아 마시는 상상의 존재. 흡혈귀의 신화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우리가 흡혈귀와 같은 말로 쓰는 뱀파이어는 유럽의 흡혈귀다. 아랍에서는 구울, 중국에서는 강시가 다른 지역의 대표적인 흡혈귀이다. 하지만 지금의 흡혈귀는 동유럽의 전승에 기원하는 것이 많다. 특히 아일랜드 소설가인 브람 스토커의Dracula에서 묘사된 흡혈귀의 모습은 드라큘라=흡혈귀라는 공식을 만들 정도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흡혈귀의 전형이 되었다.[각주:2] 물론 흡혈귀에서 드라큘라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사건에서 시작된 전설, 민담이 소설로 정착되기까지는 많은 변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소설이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치면서 두 세계는 점점 닮아간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소설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1. 김영하와 서술자인 의 일치성[각주:3]

  ① ‘지난해 펴낸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때문에’(48p)[각주:4]

흡혈귀1997년 겨울, 계간지 세계의 문학에 발표되었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1996년에 출간되어므로, 서술자의 진술과 실제가 일치한다.

 

② “김영하씨 댁인가요?”

작가의 이름과 서술자의 이름이 일치한다.

 

  이 소설의 작가인 김영하는 이처럼 자신과 이름, 작품 발표(시기)까지 똑같은 서술자를 내세우고 있다. 이와 같은 기법은 호러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으로 현실성을 높여서 독자가 느끼는 공포를 더욱 더 강화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소설 마지막 부분의 대목이 너무 도전적이었다.

그 동료 문인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하자. 조금만 눈밝은 독자라면 금세 짐작이 갈 것이다.(72p)

  이는 하나의 도전이다. 흡혈귀를 찾아내려면 찾아내보시지. 하는 그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듯했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흡혈귀로 단정 짓기 위한 작품 도처에 숨어있는 조건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2. 흡혈귀가 되기 위한 조건들

① ‘나중에서야 그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걸 알게 됐어요. 본업은 시인이라고 하더군요. 문학 평론도 하고 가끔은 소설도 쓴다는 얘기를 들었어요.(53p)’

  작품 곳곳에 그가 문인이라는 대목 역시 자주 등장한다. 이는 그의 직업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업은 시인인데 다른 분야들 역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흡혈귀의 범위는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다양한 문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으로 좁혀진다.

 

② '이를테면 그의 시는 거의 모두가 죽음과 소멸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됐어요. (중 략)그는 시에서 삶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추방하고 죽음에 대한 무한한 동경만을 담아놓았다.(61p)’

 

  그의 시에 대한 근거가 나온다. 앞서 그가 시인이라고 밝혔다. 특히 시인 중에서도 죽음과 소멸을 주제로 하고 있는 시를 주로 쓰는 시인을 흡혈귀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할 수 있다.

 

③ ‘그 평론들에서도 같은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남편이 예찬한(냉소적인 어투이긴 하지만요) 소설이나 시는 모두가 죽음이나 삶의 허무를 다룬 것들이라는 점을요 (중 략)최근 평론에선 선생님의 장편소설까지 언급했더군요.(64p)’

 

  여기에서 흡혈귀에 대한 범위는 확연하게 좁혀진다. 김영하의 장편소설을 언급한 평론. 위의 조건들보다 훨씬 더 찾기 쉬운 조건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1997년이니 그 이전에 쓰인 평론만 해당이 될 것이다. 그리고 97년 이전에 쓰인 김영하의 장편소설은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밖에는 없다.

 

④ ‘어떻게 서른다섯의 남자가 그 많은 것들을 다 읽을 수가 있었을까요(65p)’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 위의 조건들을 만족하는 서른다섯의 남자. 그가 바로 흡혈귀이다.

 

  나는 이 조건들을 가장 범위를 좁힐 수 있는 순서로 나열했다. 따라서 흡혈귀는 97년 이전에 김영하의 장편에 대한 평론을 쓴 평론가(조건1)이며, 죽음과 소멸을 주제로 한 시를 주로 쓰고(조건2), 당시 나이는 서른다섯이라 할 수 있다.(조건3)[각주:5]

 

  도서관, 인터넷에서 조건1을 검색한 결과 단 하나의 평론만이 나왔다. 남진우,숲으로 된 성벽(문학동네, 1999)[각주:6]. 그러나 그 단행본의 출판일은 99. 조건197년 보다 2년 뒤였다. 모처럼 얻은 실마리가 이처럼 쉽게 무너지는 것일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영하에 대한 평론이 있는 부분을 펼쳐보았다. 정신없이 평론[각주:7]을 읽어내려 가면서, 발표 연도만 아니라면 조건1이 마치 이 평론을 보고 쓴 듯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평론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김영하는 신인답게 그의 문학세계는 아직 미결정 상태에 있고 작품 수준 또한 고르지 않지만 그의 소설은 현재 우리 문학의 구도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각주:8]

(1996)

 

  다음 수순은 참 쉬웠다. 그 책의 날개에서 이미 남진우가 시로 등단했다는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그 책에 소개되어있는 그의 시집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찾았다. 그의 시집은 놀랍게도 조건2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각주:9]

 

죽음에게 봉헌된 / 이 소녀의 육체는 깨끗하다

(겨울 뜨락에 버려진 작은 얼룩 한 점)

그녀의 부리 위에 새벽의 첫 햇살을

그녀의 날개 위에 바람의 마지막 입맞춤을

 

그리고 그녀의 살을 파먹고 자라날

살진 구더기들에게 영광을

 

  죽음과 소멸에 대한 예찬. 그의 시집 대부분을 채우고 있던 시들 중 특히는 단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예이다. 시집의 뒷부분 이광호의 평론까지도 소설과 현실이 유사했다.


흡혈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시평

그는 시에서 삶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추방하고 죽음에 대한 무한한 동경만을 담아놓았다.(61p)

죽음의 이미지로 들끓는 한 권의 시집이 있다. 죽음의 아우성으로 채워진, 피투성이의, 피범벅인 시집[각주:10]

 

  이제 마지막 남은 조건 하나. 이 조건만 맞는다면, 남진우. 그는 실제로 흡혈귀이거나 적어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흡혈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60년생이다. 이 소설은 1997년에 쓴 것임으로 이 당시 그의 나이는 37.

그러다가 지난 1016, 친구의 생일이어서 간단하게 술을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의 생일은 94. 김희연의 글은 최소 1016일 이전에 쓴 것이므로 94일 이전에 쓴 것이라면. 그의 나이는 만으로 35세가 된다.

 

  남진우. 그는 누구인가? 소설 대부분의 내용이 실제 그와 일치한다. 김영하는 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이 소설을 왜 쓴 것인가. 그리고 소설 마지막 부분

왜냐하면, 내 생각엔 아무래도 바로 그녀가 흡혈귀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짐작.

그렇다면 사실 김희연이 흡혈귀란 말인가?

 

(하 략)






  이후의 내용은 진수가 김영하와 연락을 시도하는 것, 남진우가 교수로 있는 명지대에 전화를 했지만 역시 답을 얻지 못한 것, 그를 찾아가기 위한 교통편이나 시간에 대한 것들이다. 옛날부터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실체를 확인해야 하는 그의 성격상, 남진우를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추리과정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놓치고 지나갔다. 다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흡혈귀를 찾아내는 일은 그날의 사건을 기억에서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허황된 자위 속에 그를 남겨둘 수 없었다. 그가 남진우를 찾아간다면, 그는 다시 한 번 절망에 빠질 것이다. 그런 그를 내버려둔다면, 나는 또 하나의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할 것이다. 나는 그날 은현을 잃었던 것처럼, 진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그가 찾아낸 근거들을 조목조목 비판해야 한다. 우선, 60년생인 남진우의 97년 당시 나이는 한국식으로 계산하면 38세이다. 생일이 지났다고 해도 만 36세인 것이다. 또한 남진우가 쓴 시나리오나 소설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분석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오류는 자료에서 고찰되지 않은 김희연의 존재이다. 남진우는 그의 글을 읽기 전에도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다. 물론 그의 시나, 평론이 나에게 기억되는 남진우는 아니었다. 그는 소설가 신경숙의 남편이었다. 그렇다면 김희연은 신경숙이란 말인가?

  남진우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면서, 나는 그가 99년에 신경숙과 재혼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혼했다는 것인데, 아쉽게도 그의 전처에 대한 자료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소설은 이혼 전에 쓰인 것이지만, 남편과 헤어질 것을 결심하는 김희연과 그의 이혼 사실이 오버랩되면서 나 역시 진수의 오류에 다시금 빠져들 뻔 했다. 하지만 진수의 의견에 반박할 자료는 찾아냈다. 남진우에게는 11녀의 자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은 죄악이다(67p)’라는 소설의 흡혈귀와 남진우의 삶은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진수의 조사는 해프닝에 그칠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 결과 단 두 건 정도지만 과거에 남진우가흡혈귀의 모델이라는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오래전에 이미 제기된 주장이지만, 남진우가 흡혈귀라는 이슈는 없었던 것으로 볼 때 진수가 잡고 있는 지푸라기가 썩은 동아줄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진수의 실수는 역사전기주의 비평이 가지는 오랜 약점이었다. 그에게 이를 깨우쳐주기 위해서는 비평의 발달 과정을 따라야만 했다. 외재적 비평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 반발해서 나왔던 형식주의와 구조주의. 이와 같은 내재적 비평으로흡혈귀를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내가 국어교육과인 것을 알고 그의 자료에 대한 검토를 요구했으니, 나는 최대한 나의 전공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접근으로 진수가 얻어내지 못했던 소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진수의 행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되살아난 그날의 상처를 진수와 함께 어떻게든 풀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흡혈귀는 누구인가?

 

 

 

. 들머리

  문학은 현실의 모방이다. 굳이 플라톤이나 리얼리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독서활동을 통해 문학과 현실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재현은 현대 사회로 올수록 점점 치밀하고 구체적이 된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진실의 범람은 소재의 고갈과 창작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며, 자신의 글쓰기가 웹 검색을 통한 편집이라는 한 평론가와 표절 논란으로 명성에 타격을 받았던 어느 중견작가의 사례는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최근 문학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팩션이나 르포문학이 성행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소위 문학의 정체성이라는 거대 담론의 문제만이 아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문학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일은 작가과 독자의 신상에 영향을 미친다.사하촌으로 집단 폭행을 당한 김정한이나 영웅시대로 고초를 겪은 이문열의 사례를 통해서 문학과 현실을 착각하는 것이 단순한 인식의 문제 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 나아가서는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작가의 창작과 독자의 독서,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오해들은 이처럼 위험하다. 이러한 문제를 소설로 다룬 것이 바로 김영하의 흡혈귀이다.

  김영하의흡혈귀는 독서 현상에 대한 일종의 메타소설이다. 하지만 서술자로 작가 자신을 내세운 것, 소설과 진실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외에는 메타픽션의 일반적 특징[각주:11]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보인다. 보통 메타소설은 글쓰기 방법을 직접적으로 내세워 스스로가 소설임을 드러내는 소설쓰기 인데, 흡혈귀는 스스로가 현실임을 자청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소설과 진실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메타소설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일반적 기법보다 훨씬 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흡혈귀의 구조와 독서활동과의 연관성을 통해 이러한 글쓰기 방법이 거두고 있는 효과와 소설과 진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 소설에서 흡혈귀의 의미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 흡혈귀의 구조

  「흡혈귀는 액자구성으로 되어있다. 서술자인 의 이야기가 외부의 이야기라면, 김희연의 편지는 내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김희연의 편지 속에는 그의 남편이 쓴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따라서흡혈귀는 액자 속에 액자가 있는 겹겹액자구성[각주:12]이다.흡혈귀의 외내부 이야기들은 모두 어떤 작품(내부 이야기)을 읽고, 그에 대한 반응(외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흡혈귀의 구조

 

  「흡혈귀의 내용은 서술자인 가 작가인 김희연이 보낸 편지인 를 읽고, 편지의 화자인 저()와 김희연을 동일시한다. 그녀의 편지 속에서 김희연은 남편이 쓴 시나리오인 를 읽고, 남편과 흡혈귀를 동일시한다. 이처럼 흡혈귀는 텍스트를 사이에 두고 작가와 서술자, 독자의 상호작용이 반복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런데 작품의 마지막에서 편지 속의 시나리오인 흡혈귀는 가 있는 현실과 연결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남편을 알고 있다. 그는 내 동료 문인이며 그녀 말대로 내 소설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흡혈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이제는 좀 유심히 보아야겠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문학적 식견이 그의 천재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 살아온 덕택이라는 그녀의 말은 내게 힘을 준다.

 

  이 진술로서 창작물 속의 창작물이었던, ‘흡혈귀라는 존재는 현실로 환기되어 현실과 작품 사이의 경계는 무너지고 만다. 김희연이 쓴 허무맹랑한 편지가 실제 서술자의 주변과 유사성을 찾으면서 그의 편지는 잠정적인 진실이 된다. 그러나 소설은 단순히 내 주변의 누군가가 알고 보니 실은 흡혈귀였다.’라는 괴담 같은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 문단으로 현실로 단정 지어졌던 흡혈귀와 그녀의 편지가 다시 한 번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내 생각엔 아무래도 바로 그녀가 흡혈귀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짐작.

 

  이로써 의 동료문인이자, 그녀의 남편이었던 흡혈귀의 존재는 다시금 미궁에 빠진다. 또한 서술자는 짐작이라는 단어를 통해 흡혈귀가 누구인지, 그녀의 진술이 사실인지 아닌지 단정 지을 수 없게 한다. 그의 진술대로 만약 그녀가 흡혈귀라면 그녀의 남편이 흡혈귀가 아니라 그녀가 흡혈귀이다라는 명제를 얻을 수 있다. 흡혈귀로 추정되었던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연관성은 텍스트의 저자라는 것이다. 저자는 곧 흡혈귀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에 앞서 이 소설의 독서 과정을 통해 소설 내부와 외부의 연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흡혈귀의 독서과정

  이 소설은 단순히 내부적으로 닫힌 채 마무리되지 않는다. 작가는 앞서 살펴보았던 소설의 구조를 현실로 확장시킨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림 2. 흡혈귀의 독서과정

 

  「흡혈귀는 처음부터 서술자인 와 작가인 김영하를 동일시할만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지난해 펴낸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때문에’, ‘김영하씨 댁인가요?’라는 부분은 실제 소설과 현실을 혼동시킨다. 이는 그림 우측의 독자가 김영하와 서술자를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역시 소설 속에서 이어진다. 서술자이자 독자인 는 김희연과 그녀가 쓴 편지를, 역시 서술자이자 독자인 김희연은 남편과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의도적으로 작가가 연속되는 착각의 메커니즘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연관관계는 허구가 중첩된 작품의 가장 심층에 있는 나의 동료문인이자 그녀의 남편인 그는 흡혈귀이다라는 인식을 소설의 울타리 밖인 현실까지 확장시킨다. 따라서 독자는 김영하와 그의 주변인물을 찾으면서 현실의 인물과 흡혈귀를 연결 짓는 것이다. 소설 속 흡혈귀와 연관성이 많은 남진우는 그런 측면에서 끊임없이 흡혈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실제로 그가 이혼까지 하면서, 김영하의흡혈귀가 그의 이혼을 예언한 것이 아니냐는 억측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만약 독자가 현실에서 흡혈귀를 찾아냈다면, 김영하는 그가 의도한 목적을 성공시켰다 할 수 있다. 이미 작품의 첫머리에서 작가와 서술자를 착각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설에는 자살 안내라는 좀 특이한 일을 하는 사람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독자들 중에는 작가인 나와 그 자살 안내인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대뜸 전화를 걸어와서는 자신이 지금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뭐 해줄 말이 없느냐는 식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김영하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서술자와 작가를 혼동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당신의 시나리오는 자기 이야기지요?”

많은 독자들이 작가와 화자를 혼동한다.”

 

김영하는 그러한 착각 과정에 독자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 동료 문인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하자. 조금만 눈밝은 독자라면 금세 짐작이 갈 것이다와 같은 도발로 당신이 눈밝은 독자인지를 증명해보라는 일종의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흡혈귀의 구조에 참가하게 되며, 현실과 소설의 구분을 헤집는다. 이러한 그의 도발은 일종의 위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에서 은 긍정적으로 쓰이기도 하고(기준),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한다(한정). 현실에서 남진우를 찾은 독자는 그의 말대로 오직 조금만 눈 밝은 독자이기 때문이다.

 

. ‘흡혈귀의 의미

  지금까지 소설의 구조와 독서과정을 통해서 흡혈귀란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인물이 아님을 밝혔다. 그렇다면 흡혈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 우선 일차적으로 소설 내부에서 근거를 찾고, 외부의 자료들로 보충하도록 하겠다.

  우선 처음 흡혈귀로 지목되었던, 김희연의 남편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이다. 이는 문학의 4대 장르(, 소설, 희곡, 평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삶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지 못하며, 인생을 모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는 리얼리즘을 반발하여 나타난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예술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나는 섹스보다 이렇게 안고 있는 게 좋다. 이게 영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세상의 시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안고 있으면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문학이 욕망의 발현이라면 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몸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그의 욕망은 문학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는 문학, 예술가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 와서 는 김희연이 흡혈귀일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김희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지만 소설 중간 중간에서 그 역시 창작하는 사람이라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A4 용지 크기의 봉투에 담겨있는 그녀의 편지와 원고들, ‘꼭 읽어달라며 편지를 고심고심하며 쓴 글이라고 표현한 그녀의 말은 마치 그녀의 편지가 사실이 아닌 창작물로 읽히게 한다. 따라서 그녀의 남편과, 김희연은 한 문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잘 짜인 이 소설의 특성상, 마지막 구절을 패러디하여 이런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김영하가 흡혈귀인 것만 같다. 이건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이 작품이 외부까지 구조가 확장되고 있다고 했을 때, 작가였던 김희연과 그 남편이 같은 흡혈귀라면, 그 역시도 흡혈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작가라는 의미에서 김희연과 그 남편, 김영하는 모두 같은 인물이다. 이에 대한 보충은 김영하의 인터뷰 자료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남자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거세당한다는 것, 여성화된다는 것이 에요. 남자의 세계는 해군 제독이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상징할 수 있어요. 그러나 소설가의 삶은 정치적으로 누구도 지배하려 하지 않아요. 아니, 지배할 수 없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나 남자가 소설 쓰겠다고 하면 말려요. 심지어 문학 독자가 된다는 것도 거세당하는 삶이에요. 장정일이 그랬잖아요? 직장인 남자라면 회사에서 소설 읽지 말라고.

나는 소설을 쓰기 이전까지는 매우 남성적인 세계에서 살아왔어요.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어릴 때 가장 많이 읽었던 책도 전쟁사였고, 대학도 여자가 거의 없는 경영학과를 다녀 여성적인 세계를 거의 알지 못했어요. 그 런 내가 소설가가 된다는 건, 내가 알고 있던 기존의 모든 세계와 결별하는 것이었어요. 그야말로 감성으로 호소하는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 선택 자체가 나처럼 남성적인 세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였어요.[각주:13]

 

김영하는 소설가의 속성을 여성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를 거세라고 하였는데, ‘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는 소설의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융식으로 말하면 로 대표되는 김영하는 퍼소나(persona), 김영하의 아니마(anima)인 김희연은 영혼(soul), 그녀의 남편은 쉐도우(shadow)라 할 수 있다.

 

. 마무리

  지금까지흡혈귀에서 반복되는 착각의 구조와 흡혈귀의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현실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이유는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유사한 현실에 대입시켜서 찾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는 잘게 잘린 현실의 조각들이 작가의 의도대로 배열되어 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으로 불확실한 것을 이해하려하기 때문에 소설가의 삶이나 역사적 사실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친 억측으로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흡혈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실제 독자까지 소설의 구조 속에 포함시켜, 문제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한 동시에 흡혈귀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서 작가가 생각하는 작가관에 대해 엿볼 수가 있었다.흡혈귀는 소설 전개나 문체상 혹은 주제의식에 있어서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장르문학의 영역이었던 공포소설을 차용한 이야기 전개나 소설 구조에 독자를 편입하려는 실험적인 기법만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진수에게 보내고 얼마 뒤, 나는 진수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그날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8월의 어느 토요일. 인터넷에서 관들이 뒹구는 지하실을 보았을 때보았을 때, 우리는 다음 탐험장소를 일제시대 때 버려진 성당으로 정했다. 그 주변에는 범인을 찾지 못한 연쇄 성폭행 살인사건이 있던 터였다. 워낙 단서가 없었고, 피해자의 목에는 뾰족한 것으로 찔린 자국이 있었기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흡혈귀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두운 밤. 산 속, 한 여자가 홀로 걷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은 어둠에 쫓겨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오래된 고목에서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듯 여자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 때 여자의 눈앞에서. 무언가 치솟는다. 기분 나쁜 괴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희미한 달빛을 가렸다. 깜짝 놀란 여자는 주저앉는다. 여자는 일어나려 하지만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남자의 힘이 너무 강했다. 여자는 있는 힘껏 반항했다. 여자의 하얀 목덜미에서 칼이 번쩍였다. 여자를 살짝 찌른 칼끝에는 핏방울이 맺혔다.

  그때, 갑자기 은현이가 소리를 지르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와 은현이는 한데 엉켜 뒹굴었다. 우리도 나가야 했었다. 왜소한 은현이가 칼을 든 거한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수는 이미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좀 더 겁쟁이였으면 좋았겠지만, 내 시선은 차마 그의 칼이 은현이를 찌르는 장면을 외면하지 못했다. 남자는 칼을 버리고는 달아났다.

 

  학교로 돌아온 우리는 이야기했다. 흡혈귀를 보았어. 산에서 흡혈귀를 보아서 뿔뿔이 흩어졌어. 우리는 단지 흡혈귀가 무서워서 도망친 것이라고. 도망치던 도중 칼에 찔린 은현이를 보고 신고했다고.

 

  술에 취한 진수는 흡혈귀는 없다며 울부짖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불 꺼진 쇼윈도에 우리 모습이 비췄다. 자꾸만 넘어지려는 진수를 일으키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흡혈귀는 여기 있다고.

 

 

 

 

 


  1. 원래 이 글의 제목은 없다. 파일명은 ‘흡혈귀 조사자료’로 제목으로 쓰기에는 부족하여 따로 제목을 달았다. [본문으로]
  2. 흡혈귀에 대한 자료가 방대하게 나열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분량을 줄이고 편집했다. 검색 결과 Wikipedia에서 가져온 자료가 대부분이다. [본문으로]
  3. 실제 파일에도 있던 제목으로 원래는 두서없이 섞여있었으나 작품에 나온 순서대로 정리했다. [본문으로]
  4. 「흡혈귀」가 수록된 모든 자료를 검토한 결과, 글쓴이가 참고한 것은 김영하,『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숫자p)는 자료에 인용된 본문의 페이지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5. 자료의 글은 여기에서 끊겼다가 자료를 검색하는 다음 부분으로 이어진다. 아마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6. 출판사 및 연도를 추가했다. [본문으로]
  7. 위 소개된 단행본에 수록된 평론. 제목은「나르시시즘/죽음/급진적 허무주의」. [본문으로]
  8. 남진우, 「나르시시즘/죽음/급진적 허무주의」,『숲으로 된 성벽』(문학동네, 1999), 274쪽. 아마 죽음에 관련된 소설을 예찬했다는 본문 2의 ②에 대한 자료로 보인다. [본문으로]
  9. 남진우, 「새」,『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지성사, 1996), 46쪽. [본문으로]
  10. 위의 책, 이광호, 「성스러운 피」, 113쪽. [본문으로]
  11. 퍼트리샤 워(김상구 역), 『메타픽션』(열음사, 1990), 16~17쪽. [본문으로]
  12. 액자구성에 관한 용어는 하나의 액자 속에 여러 가지의 내부 이야기가 있는 순환액자구성과 하나의 액자 속에 하나의 내부 이야기가 있는 단일액자구성이 있다. 액자 속에 여러 이야기가 있는다는 점에서 겹겹액자구성은 순환액자구성과 비슷하지만, 전자가 병렬구조라면, 후자는 중층구조라 할 수 있다. 기존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는 이중액자구성이 있지만, 안에 여러 이야기가 중첩되어있다면 해당 용어를 새로 정립해야할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다중’이란 용어를 생각해봤으나, 사전 상의 의미로 다중은 다수의 사람을 뜻하는 말이므로 겹겹이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에서 겹겹액자구성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본문으로]
  13. 고나래,「<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로 돌아온 작가 김영하」,『문화+서울 vol.043』(서울문화재단, 2010. 9월호) 편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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