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림 평상
들림의 시선으로 본 <설국열차>의 상징과 의미들 본문
* 주의! 이 글은 감당하지 못할만큼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불편하게 재밌는, 아이러니 폭주극 <설국열차>
<설국열차>가 누적 관객 400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일종의 우려기도 했다. <설국열차>는 지금 빠르게 갱신되는 관객 수가 보여주듯, 잘 만든 상업영화다. 거대 자본인 CJ의 마케팅 물량 공세도 영화의 흥행에 한몫했을 것이다. 또한 할리우드의 그것에는 못 미치지만, 꽤나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한 특수효과도 우리나라 최고의 기술이 투입된 결과이다.
나의 우려는 이 지점에 있었다. 세계적으로, 또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배우들. 화려한 시각효과. 봉준호라는 스타 감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국열차>는 관객들의 입맛을 완벽하게 사로잡지는 못한 것 같다. <설국열차>에 대한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관객이 기대한 <설국열차>와 감독이 의도한 <설국열차>의 간극이다. 앞에서 잘 만든 상업영화라고 했지만, 관객의 극단적인 반응은 상업영화로서 <설국열차>가 <트랜스포머>나 <7번방의 선물>보다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자본이 투입된 결과물인 <설국열차>. 하지만 영화의 의도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도를 읽어낸 관객은 결코 <설국열차>를 보는 과정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맥락들은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하나의 아이러니로 재탄생했다. 창작물과 그 유통과정이 또 하나의 훌륭한 블랙코미디 퍼포먼스가 되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설국열차>는 참 재미있는 영화이다.
사실 <설국열차>는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 주제는 비교적 분명하다. <설국열차>는 출발부터 기술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가속화된 지구온난화를 CW-7이라는 또 다른 기술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가 지구의 빙하기였다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낙관주의가 불러 온 비극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그 빙하기의 방주로 ‘설국열차’가 등장한다. 기차는 첨단 기술의 결정체로 과학기술로 이미 멸망한 문명의 또 다른 구세주이다. 기차는 산업혁명의 상징과도 같다.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과 더불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산업사회의 힘은 바로 돈(자본)에서 나온다.
기차가 움직이던 때, 사람들은 지불한 비용에 따라 칸을 배정받는다. 주인공인 커티스가 탄 꼬리칸의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칸의 차이는 곳, 계급의 차이가 된다. 그 계급은 돈으로 인해 날 때부터, 배정된 위치이고 고정된 자리이다. 그 고정된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질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기차는 하나의 닫힌 계로서 완전체를 이루고, 이는 사회적 체계를 의미한다. 그 체계는 비교적 분명하다. 윌스트리트와 포드사를 떠올리는 게 하는 기차의 절대자 윌포드의 이름에서 자본주의와 현대 산업사회 체계의 짙은 그림자가 느껴진다.
꼬리 칸의 사람들은 재료도 알 수 없는 합성물을 먹고, 앞쪽 칸의 사람들은 유기농으로 재배된 신선한 음식을 먹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먹거리의 양극화 문제를 생각나게 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체계 교육은 섬뜩할 수준으로 우리 공교육과 닮아있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게을러서 똥에서 구른다는 아이의 말은 우리 학교가 사회 취약계층을 보는 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부분들은 기차가 현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일깨워 준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커티스 일행의 계급 투쟁을 따라간다. 이는 돈에 따라 형성된 계급을 유지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다. 그들의 투쟁 과정은 마치 사회주의적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두 가지의 이념 모두 기차 속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커티스의 혁명(사회주의적 혁명)도 결국 좋은 지도자(혹은 노동자 계급이)가 이 사회를 통치한다면,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근거한다. 이처럼 기술(생산수단)에 대한 맹신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총을 든 암살자로 대표되는 체계의 무서움은 계급에 상관없이 자행된다. 앞쪽 칸 사람들을 무자비 하게 쏘는 모습. 사람에 의해 형성된 체계가 나중엔 사람 위에 군림한다.)
하지만 여기서 보안설계사인 남궁민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을 제안한다. 바로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기차가 상징하는 ‘기술’이라는 체계.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엔진’을 과감하게 버리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얼음이 녹고 있다는 합리적 사고(이면서 또 추측에 의한 비합리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지만, 윌포드와 커티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다. 그것은 바로 체계 밖의 삶, 대안적인 제 3의 길을 의미한다.
결국 <설국열차>는 이러한 부분에서 기존의 자본주의(혹은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와 다른 노선을 걷는다. 그것은 기술 중심 사회가 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드러냄으로써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의 끝 부분, 커티스가 엔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윌포드의 설득에 흔들리면서도 타협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 바로 엔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5살 미만 어린이의 희생을 동력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미래 세대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닥칠지도 모르는 채, 무분별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원자력과 화석연료, 끊임없는 자연 파괴들은 어쩌면 어린 아이에게 엔진을 돌리게 하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다.
영화의 끝 부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두 명의 아이는 산업사회에서 희생되었던 계층들을 대표한다. 흑인, 어린이, 여자, 청소년, 동양인. 기차는 산업혁명의 선봉이면서, 제국주의 수탈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세계가 눈으로 뒤덮인 ‘설국’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극지인 동시에,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하얀 도화지임을 뜻한다. 마지막 생명의 가능성으로 등장한 북극곰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의미하며, 노아의 방주에 날아 온 비둘기가 물고 있는 올리브 가지이기도 하다.
<설국열차>는 이처럼 사회 체계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기술에 대한 문제를 다룸으로써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특히나, 설국과 꼬리칸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속에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열차(물론 앞쪽 칸이긴 하지만)를 배치함으로써, 그 사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군상을 만나고 생각나게 한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길리엄과 메이슨 총리, 윌포드, 커티스 등의 가치관과 그 행동방식도 충분한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다.
<설국열차>는 많은 철학적 질문들과 현실적 문제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트릭스>와 비교될 수 있겠다. 하지만 단순한 지적 유희만이 아닌 치열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매트릭스>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진지하다. 그럼에도 <설국열차>를 정치적 혹은 사회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은 영화의 재미를 급격히 떨어뜨린다.
<설국열차>는 적어도 외재적 맥락에서 즐거울 수 있는 영화이다. 물론 <설국열차>가 갖고 있는 스토리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없이, 온전히 그 즐거움을 누리긴 힘들다. 처음에 얘기했듯, 창작물과 그 생산ㆍ유통과정이 빚는 아이러니 역시 봉준호 감독의 노림수라는 생각이 든다. 재밌지 않은가? 그리고 불편하지 않는가.
*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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