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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림 평상
소나무가 바람 손에 이끌려 세상이 쏟아지는 땅 끝 찾을 무렵 소나무는 아주 작은 아이였다지 떠나 온 샘물 그리던 바다 제 있던 뭍 쉼 없이 바라보다 조그만 울음소리 살폿 들었다지 바다는 홀로 떨고 있는 소나무에게 내가 언제까지나 푸르게 지켜줄게 손가락 마주 걸고 약속했다지 바다는 몰랐지 껌껌한 밤하늘 자기가 머금을 줄 세월만큼 훌쩍 커버린 소나무가 제 머리 쓰다듬을 줄 바다는 보았지 하얗게 글썽이는 눈에 맺힌 별들을 손 내밀어 닦아주던 가지마다 열매처럼 맺힌 눈물방울을 바다는 기억할까 바람 손 잡고 세상을 다니던 때를 나란히 걷던 작은 반짝임들을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푸르게 지켜왔음을 2013. 4. 7(일) 이기대 해안산책로에 다녀와서. 절벽 끝에 있는 소나무와 바다가 너무 닮아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문득 빗물이 고인 거리를 걸을 때, 아무 준비 없이 옛 노래를 듣게 될 때, 며칠을 앓다 일어나 오랜만에 햇볕을 마주할 때, 처음 보는 이의 얼굴에서 낯익음을 발견할 때, 그리고 그 낯익음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럴 때면 작은 단서들 속에 숨어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나에게 다가오곤 한다. 숨어있는 기억들은 세상에 사는 벌레들만큼이나 제각각이다. 어떤 기억은 거미줄에 맺힌 작은 이슬방울 같다. 우연히 어딘가를 지나다가 그런 기억의 덫에 걸리게 되면 나도 모르게 연약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또 다른 기억들 중에는 먼 옛날 보이지 않는 곳에 새겨놓은 문신 같은 기억도 있다. 분명하게 새겨진 삶의 한 장면을 알몸이 되는 순간에야 발견하곤, ‘그땐 참 많이 아팠었지.’ 하고 생각하는 기억 말이다. 그 기억들 중에..
얼어붙은 화살 안젤름 키퍼(1945 ~ ), , 1984-1986. 혼합재료, 280 x 380cm, 호주 시드니. 오늘도 벽에 부딪히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렇게 맞이하는 아침엔 꼭 한 끼를 거르게 된다. 12월의 아침 9시는 새벽에 꺼진 중앙난방의 온기가 완전히 사그라지는 순간이다. 옆방에 살던 한 언니는 이맘때의 시간을 ‘겨울로 넘어가는 시간’이라 불렀다. 내 몸 어딘가에 닿는 기숙사의 차가운 벽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일깨워줄 만큼 현실적이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벌레처럼 스멀스멀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는 언제나 낯설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여기서 나는 혼자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자라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예민하고 부끄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