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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걷는 남자(2015)

들림 2015. 11. 3. 11:06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90년대 영화들을 좋아한다. <포레스트 검프>와 <콘택트>, <캐스트 어웨이>는 내 인생의 영화들이다. 그는 2000년대 들어와 3D 애니메이션을 제작•연출하기 시작한다. <폴라 익스프레스>, <베오울프>, <크리스마스 캐롤>은 할리우드의 3D 기술력을 극단까지 끌어올렸으나, 호평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 로버트 저메키스는 원래부터 첨단 테크놀러지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했던 감독이다. 그를 단번에 스타로 만들어준 <빽 투 더 퓨처>부터 그랬다. 2000년대 이전의 작품들은 완성도 높은 휴먼드라마에 특수효과가 너무나도 잘 녹아들어있었기에, 특수효과 자체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포레스트 검프>의 합성장면이나 <콘택트>의 우주 장면들, <캐스트 어웨이>에서 보여준 물 CG 등은 (조금 과장해서) 지금 보아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다.


  <폴라 익스프레스>부터 얘기는 달라진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최초의 아이맥스 3D 장편 영화의 영광을 얻었지만, 다소 부자연스러운 캐릭터의 움직임으로 평단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발전된 모션캡쳐 기술로 3D 캐릭터를 실사에 가깝게 구현한 <베오울프>와 <크리스마스 캐롤>을 내놓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안젤리나 졸리, 짐 캐리 등 배우들을 충실히 재현한 컴퓨터 그래픽만 잠깐 화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의 영화는 더 이상 관객과 평단 모두를 사로잡지 못했고, 혹자는 그의 커리어가 끝났다고 얘기했다. 로버트 저메키스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는 이미 일생에 한 번 만들까 말까 한 명작들을 몇 편이나 만들었으니,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라며 과거를 추억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재’의 감독이었다. 나에게 <하늘을 걷는 남자>는 아마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 듯하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1970년대 당시 세계 최고(最高)의 건물이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우리에게는 쌍둥이 빌딩으로 더 유명한 두 빌딩 사이에 줄을 매달고 건넌 프랑스 곡예사 필립 프티의 이야기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실화라니, 더 놀라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2008년에 <맨 온 와이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바 있다. 필립 프티 역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조셉 고든 레빗이 맡았다.


  영화의 전반부는 필립 프티가 왜 곡예사가 되었고, 어떻게 뉴욕으로 건너갈 결심을 했는지가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시간의 흐름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편집의 미학은 마치 <포레스트 검프>를 연상시킨다. 영화는 중반부로 넘어가면서부터 케이퍼 무비의 형태를 띤다. 빌딩에 줄을 매달기 위해서 동료들을 모으고, 계획하고, 설치하는 것까지가 주요 내용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시놉시스를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빌딩 사이를 건너는 장면이다. 영화 전체로 봤을 땐, 고작 20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20분은 내가 본 거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가 느껴졌다. 손에 어찌나 땀이 나던지, 입대 신체검사를 볼 때 이 영화를 봤다면 면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친구와 손을 잡고 본 사람들은 아마 팅팅 불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참 혼자보기 좋은 영화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영화의 전반부나 중반부나 무난하다. 음악도 좋고, 편집도 좋지만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느낌이다. 중반부의 동료를 모으는 장면은 개연성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거장은 거장이다. 저메키스는 마치 줄을 타는 것처럼 놀라운 밸런스를 보여준다. 명작이란 것은 어느 시대에 봐도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전형적인 요소는 필수다. 하지만 클리셰에 그친다면, 결코 수작을 넘어설 수 없다. 대체 할 수 없는, 이 영화만의 무엇. 그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경이로운 한 컷이 수작과 명작을 가르는 종이 한 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걷는 남자>는 명작이 갖추어야 할 기본과 개성을 모두 갖추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막귀인 나로서는 조셉 고든 레빗이 프랑스식 억양을 잘 구사하는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인처럼 느껴졌다. 익살스러운 장면들과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들에서는 전성기의 짐 캐리가 언뜻 보이기도 한다. 톰행크스, 조디 포스터 등 현 시대의 명배우를 잘 기용하는 것도 저메키스의 특기이다. 처음 보는 배우인 애니 역의 샬롯 르 본도 정말 사랑스러웠다. 애니의 경우, 남주인공의 조력자 정도의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굳이 마지막에 독립적인 주체임을 언급하는 신이 좋았다. 여담이지만 저메키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뭐 일찍이 <포레스트 검프>에서 출발하여 <캐스트 어웨이>에서도 어렴풋이 찾아볼 수 있고, <콘택트>에서는 전면적으로 드러냈으니 그만하면 진보적이다.


  무엇보다 <하늘을 걷는 남자>가 특별하게 다가왔던 점은 이 영화가 마치 로버트 저메키스가 걸어온 길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필립은 정말 로버트 저메키스를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줄타기를 쇼라고, 필립을 어릿광대라고 비웃는다. 이는 마치 예술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영화(더 정확히는 상업영화)와 닮아있다. 그럼에도 필립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술이며, 끝까지 자신이 아티스트라고 주장한다. 또한 영화에서는 필립이 줄을 연결하는 과정을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묘사한다. 줄을 연결하는 일은 필립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동료들과 함께 고군분투하면서도, 결국 빛을 받는 것도 죽음도 혼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필립이 보여주는 광기들은 감독(혹은 제작자)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벤 킹슬 리가 연기한 필립의 줄타기 스승인 파파 루디는 저메키스의 스승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 울컥했다. 결국 필립이 관객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분에선 그만 울고 말았다. 안전줄을 매달고 관객들을 속이라는 스승의 조언에 불같이 화내는 필립의 모습에선 젊은 영혼의 열정이 느껴졌고, 케이블과 빌딩,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에게 필립이 진정으로 고마움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노감독의 영화와 삶에 대한 통찰이 느껴졌다. 이 영화와 분위기가 비슷한 <포레스트 검프>와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겸허히 돌아볼 수 있는 여유. <포레스트 검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극중에 미국에 건너간 필립이 새로 모집한 미국인 동료들이 나온다. 그들은 새우잡이 배를 언급하는데, 이 부분은 <포레스트 검프>의 오마주처럼 느껴진다. 시대적으로도 <포레스트 검프>의 새우잡이 에피소드와 겹친다. 영화의 배경인 74년은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한 이후이다. 


  ‘인생은 외줄타기’라는 관용어는 식상하다. 하지만 그 의미를 오롯이 영상으로 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하늘을 걷는 남자>는 인생에 관한 얘기다. 인생이란 원래 한발씩 밖에 내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줄을 타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와줄지언정 결국 혼자 맞서는 것이다. 혼자서 혼자의 줄을 타는 것이다. 파파 루디는 줄타기를 배우다가, 떨어질 뻔 한 필립에게 말한다.  "대부분의 곡예사들은 끝에서 죽는다. 아직 세 발짝이 남았는데 다왔다고 생각해서다." 모든 곡예사는 언젠간 줄에서 내려와야 한다. 떨어지든, 자신의 발로 땅을 내딛든. 그런 점에서 아직 로버트 저메키스의 외줄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영화는 현실적인 허구이다. 허구와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여, 그것을 건너 사람의 마음에 닿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음에도 매력적인 일임은 틀림없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허구 같은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참 재미있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그의 고집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증명한다. 3D IMAX로 봐야지만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 20분만으로도 티켓 값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명작들이 있지만, 할리우드만이 만들 수 있는 명작영화들이 있다. 바로 스케일이 큰 블록버스터들이다. 이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돌아오고 있다. 한동안 주춤했던 리들리 스콧의 <마션>이 그랬고, 로버트 저메키스의 <하늘을 걷는 남자>가 그랬다. 11월 5일이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가 개봉한다. 부디 그도 멋지게 재기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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