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림 평상
5.18 을 기억하며 본문
2016. 3. 23
#8
광주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별밤에서 아침을 먹었다.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가 아닌 진짜 밥다운 밥이었다. 김치, 시금치, 연근조림, 콩자반 등 밑반찬들은 정갈했다. 계란을 입혀 노릇노릇 구운 동그랑땡, 조개를 넣고 끓인 미역국이 메뉴였다. 주인 분은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 이렇게 기억하셨다.
“그때는 나도 어릴 땐게. 잘은 기억이 안나요. 우리 집이 이불집을 했는데, 어른들이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두터운 솜이불이 어따 쓸란가 했더니. 그거를 벽마다 둘렀데요. 총알이 날아오니까. 솜이 총알을 막아줄 수 있응께.”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됐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총소리가 얼마나 크고 요란한지 알 것이다. 고요는 그토록 쉽게 깨어졌다. 평온한 일상에는 균열이 일어났다. 공포가 스며드는 그 틈을 메워보려고, 그들은 이불을 벽에 둘렀다. 총성이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놀라 주저앉았을 것이다. 외마디 비명과 핏자국에 대한 불길한 상상은 어김없이 메아리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었을 테고.
처음 광주에 간 것은 초등학교 때다. 어린 시절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던 친구네 아버지가 직장을 옮겼다. 친구네는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이사를 갔다. 왜 부모님들이 우리를 5.18 자유공원에 데려갔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끌려왔던 상무대 근처에 지어진 공원이다. 그곳에서 피해자의 사진을 보았다. 아마 실제로 죽은 사람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일 게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처참했기에 그 이미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첫 대면한 80년 5월의 광주는 죽음이었다.
5.18 자유공원에는 문화해설사 할아버지가 계셨다. 그분은 입구에서 책을 옮기다 나와 마주쳤다. 안내 데스크에는 곱게 화장을 하신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할머니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다. 부산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멀리서 찾아주셨냐며 연신 반가워하셨다. 할아버지는 대뜸 부산 분들도 5.18에 대해 아셔야 한다고 했다. 이 땅의 민주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며.
할아버지는 하나라도 더 많이 얘기하려 하셨다. 당신은 그때 광주 근교인 장성의 공무원이셨다. 직접적으로 5.18을 체험한 건 아니지만 친정이 광주에 있었다. 그리고 5.18 자유공원에서 근무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중에 인상적인 이야기는 어느 노신사의 방문이었다. 어느 날 키가 185cm는 되고, 잘생긴 할아버지 또래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 사람은 할아버지에게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무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했단다. 말씨는 서울말이고 얼굴도 분명하게 기억나지만, 정확히 그 사람이 누군지 할아버지도 여태껏 모르신다. 다만 3시간 넘게 상무대를 돌아보고, 눈물을 훔친 모습으로 여기에 근무했던 군인일 것이라 추측했을 뿐이다. 할머니가 말씀을 보태기를, 나중에 자신이 계엄군이었다 고백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점점 5월의 마지막 날들로 향할 때마다 할머니는 휴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화장이 다 지워지실 텐데. 할머니는 멀리서 왔으니 커피라도 자시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할머니에게서 건네받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일은 광주가 아니라 어디라도 일어날 수 있었어요. 부산, 서울, 인천 어디라도. 그때는 그랬어요.”
자유관에서 홀로 다시 한 번 5월의 기록들을 돌아봤다. 잘 참다가 피 묻은 태극기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 나라가 죽였는데, 그들은 태극기를 덮고 애국가를 불렀다. 자신들을 그토록 빨갱이며, 폭도라고 몰아붙였는데도.
자유관 옆에 마련된 상무대는 그때 당시 고문과 재판이 이루어졌던 헌병대 막사를 재현해놓았다. 사람 모형이 너무 진짜 같아서 한기마저 들었다. 비명소리, 창살 두들기는 소리, 때리는 소리, 맞는 소리. 그때를 환기시키는 음성신호들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들은 철저하게 인간을 파괴하려 했다. 150명의 사람들을 좁은 방에 가두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으며, 송곳으로 손톱 밑을 찔렀다. 아주 적은 양의 밥을 두 사람이 함께 먹도록 했다. 서로를 때리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이길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은 끌려온 사람들마저 인간이 아니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을 것이다. 여성들에게 자행된 고문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때 붙잡힌 사람들 421명의 재판이 고작 한 시간 정도 만에 이루어졌다. 설령 죄가 있다 한들, 421명의 죄를 한 시간 만에 모두 판단할 수 있었을까?
#9
광주 외곽으로 빠져나와 국립 5.18민주묘지에 도착했다. 인적이 없어 넓은 부지가 휑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민주의문을 들어서니 문화관광해설사님께서 인사를 해주셨다. 김덕순님은 “혹시 설명 필요하세요?” 하고 친절하게 물으셨다. “네. 그럼 감사하죠.” 하고 대답하자, 김덕순님은 다시 안내소에 들어가 선캡을 쓰고 나왔다.
김덕순님과 함께 민주광장을 걸었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자, 얼마 전 민주공원에 다녀왔다며 반가워하셨다. 용궁사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일도 덧붙였다. 티 없이 맑게 웃는 모습에 나도 무거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시간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오셨어요?”
충분히 둘러볼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다. 김덕순님을 따라 참배광장으로 향했다. 티브이나 다큐에서 보던 추모탑이다. 대통령들이 5월 18일이면, 이곳에 들러서 추모행사를 하던 것이 기억났다. 김덕순님은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대부분 방금 5.18 자유공원에서 보고 왔던 터라 생생했다. 그럼에도 주의 깊게 들으려 노력했다. 기억은 금방 흐려지니까, 한 번 더 새겨야 했다.
묘역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봉분이 훨씬 많았다. 80년 당시 희생자를 비롯하여, 고문 후유증 등으로 이후에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행방불명자로 처리되어 시신을 찾지 못해 비석만 남은 무덤들도 있었다.
김덕순님은 익숙한 걸음으로 묘 사이를 오고 갔다. 나는 그를 따라 지나치는 비석의 이름과 사진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묘 앞에 멈출 때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호 팽목 분향소에서 느낀 것처럼 여기에는 사람이 묻혀있다.
윤상원 열사는 은행을 그만두고 들불야학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이후에 시민군의 대변인이 된다. 그리고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입하면서 생을 달리한다. 그의 묘비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더 새겨져 있다. 대학 후배이자 야학의 동지였던 박기순 님이다. 박기순 님은 80년이 되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게 된다. 후에 두 사람은 영혼결혼식으로 맺어진다. 그 영혼결혼식에 바쳐진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임신 8개월이던 최미애씨는 남편을 찾아 집을 나섰다. 계엄군의 총알은 만삭의 여인도 피해가지 않았다.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 정의로웠던 고등학생들. 밭일 하던 할머니까지. 모두가 여기에 묻혀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묘에는 봉분조차 없다. 행불자로 인정받기까지 가족들이 직접 뛰어야 했다. 정부는 그저 서류를 받기만 했다. 어찌 그리 이 나라는 달라진 게 없을까. 김덕순 님은 그들 중 한 분인 임옥환 님의 묘비에 바쳐진 고영서 시인의 시를 읊으셨다. “김진덕 여사의 5월”. 눈을 감고 그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세월호에서도 아직 9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기구한 운명의 할머니도 계셨다. 김혜옥 할머니는 일본인 교사에게 속아 일제강점기에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에 끌려가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조국에서 1980년 5월 광주를 겪게 된다. 할머니는 광주에서 청년들을 폭행하는 계엄군을 만류하다 부상자가 되셨다. 인권에 대한 유린과 야만들, 폭력은 반복되고 이처럼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것은 특정 국가나 정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의 문제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되는가. 무엇이 인간다운 것이고, 존엄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의 부재가, 무관심이, 이런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유영봉안소에 들어가니 묘역에 묻힌 분들의 영정사진이 나란했다. 시간의 흐름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셨다. 80년 5월의 상처를 안고 생이 이어지신 분들. 이곳에는 리영희 선생도 묻혀계신다. 그분의 묘에도 따로 들렀다. 비석에는 ‘이성의 붓으로 진실을 밝힌 겨레의 스승 여기 잠들다'라는 비문이 쓰여 있다. 고개를 숙이고 읊조렸다.
추모관에서 김덕순님과 헤어졌다. 감사를 표하는 나에게 오히려 한 분에게라도 알릴 수 있는 사실에 반대로 고마워하신다. 나도 알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한다. 38분 가량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추모관을 빨리 나와야 했다. 운영 시간이 오후 6시까지였다.
마지막으로 망월동 구 묘역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비닐에 싸여 묻혀있던 곳. 태극기에 감겨 잠들어 있던 곳. 이장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에서 늙은 아버지는 구멍 난 자식의 두개골을 닦으며 오열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흰머리와 주름은 더 빨리 찾아올까. 가늠할 수조차 없는 아픔들이 세상에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구 묘역에는 이한열 열사가 묻혀있다.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그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다. 처음 그의 이름을 들은 것은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이다. 오래된 영상에서 문익환 목사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울부짖었다. 아마 나의 마음이 처음 움직인 것은 그때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의 나이를 훌쩍 넘어 스물아홉을 지났다. 세상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변명 같은 혼잣말 밖에 할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있다. 숙소도 정하지 않았다. 노을을 등지고 묘역을 내려왔다. 일일이 둘러보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묘지를 나오면서 다시 한 번 묘들을 바라봤다.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과 마주했다. 다시 오겠습니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되물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마지막 날입니다. 좀 쉬면서 정리하고 싶습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23.
광주의 밤거리를 걸었다. 밤인데 그리 춥지 않았다. 봄. 불현듯 이번 여정의 분기점들이 모두 봄에 일어난 아픔이란 걸 깨달았다. 세월호 2014년 4월 16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2009년 5월 23일,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 나는 마음에 남아있는 죄책감과 슬픔을 큰 축으로 하여 여행 중이다.
이 반복되는 비극,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학살 속에서 우리는 희생자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란 걸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그런 일은 닥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비극의 희생자 모두가 그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모두 어디로부터 촉발된 재앙인가? 권력과 탐욕. 극도의 이기주의가 불러온 참사이다. 세월호 사건에는 얼마나 많은 탐욕들이 얽혀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낙후된 선박을 허용하게 해준 규제 완화. 대충주의로 넘어갔던 안전 점검. 고용불안으로 미숙할 수밖에 없었던 계약직 선장, 선원. 거기에 복잡하게 얽혀있을지도 모르는 로비의 거미줄. 그리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들. 왜 국가는 그들을 구조하지 않았는가? 그게 이 나라, 혹은 이 나라를 이루고 있는 끈끈한 카르텔의 힘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다소 유치하지만 직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재벌, 언론, 정치의 유착.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이래로 늘 그래왔다. 반민특위도 실패했고, 결국 10년의 민주 정권도 실패했다. 광주는 4월의 재현이고, 4.3의 재현이고, 보도연맹사건의 재현이다. 그리고 그것과 싸워 대통령이 된 사람도 그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그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은 어찌 맞설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그걸 사람의 힘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가해자도 인간이며, 피해자도 인간이다.
위의 사건들은 개인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들이다. 우리는 비극 앞에서 무수한 가정들을 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방송인 ‘416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부분이 있다. 아이가 원하는 걸 하게 해줄 걸. 사랑한다 말할 걸. 그때 화내지 말걸. 선생님 말, 선원들 말 잘 듣고 가만 있으라고 하지 말 걸.
5. 18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80년의 5월, 서울역 회군을 안타까워한다. ‘전두환 사퇴’와 ‘비상계엄령 해제’를 외치며 서울역 광장에 모인 10만 명의 대학생들.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던 새누리당 국회의원 심 모씨는 예상보다 많은 인원을 통제할 수 없단 이유로 해산을 주장한다. 결국 시위대는 각 학교로 복귀하게 된다. 신군부는 이에 두려움을 느꼈고, 계엄령을 확대한다. 그리고 3일 뒤인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인 3월 20일에 떠나게 되었을까? 물론 시기적으로 맞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내가 분명하게 느끼는 것은 그냥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우주의 일부이면서, 한 우주다. 삶의 여정과 세상의 흐름은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다만 그 목소리가 너무 미약하여 우리가 알아차리기 힘들 뿐이다. 우연을, 그 신호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지 말지는 개인의 몫이다. 그때 발견한 그 노란 리본 열쇠고리는 알고 보니 여기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리본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모두 저 사건들의 3월 20일 쯤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미 많은 일들은 출발했고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 타임머신이란 게 있어서, 2014년 3월 20일로. 80년 3월 20일로. 2009년 3월 20일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미 벌어진 뒤에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다. 일어난 비극들, 그리고 거기서 상처받고 아픈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미리 겪은 희생자이다. 그들은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누구를 위해서인가? 첫째는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은 다시 이런 비극을 누구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셈이다.
3월 20일. 적어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해보자. 그것이 설령 절벽을 향해 온몸으로 부딪히는 일이라 해도. 침묵하지 말고. 귀를 닫지 말고. 커다란 사건들과 미세한 소리들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자. 나중은 오지 않을지 모르니까. 지금. 너에게.
그리고 오늘은 4월 16을 지나, 5월 18일이다. 맞이할 수 있나. 그런 자격이 있나. 부끄럽다. 자신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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