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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연설회를 다녀와서

들림 2016. 9. 30. 00:28

 바삐 일어나느라 밥을 하지 못한 날. 혹은 아침 차려먹기 귀찮은 날. 출근길을 조금 돌아 맥도날드 서면점에 들러 맥모닝 세트를 먹곤 한다. 서면으로 출퇴근하기 전까지, 내게 주디스태화 앞은 친구를 기다리는 곳이였다. 그곳은 원래부터 약속명소였다.

 평범한 목요일 저녁, 그저 퇴근하는 걸음 중 하나. 나는 그곳에 멈춰섰다. 녹색당과 노동당의 공동정당연설회가 있었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부검영장 발부를 규탄하는 자리였다. 지나는 길이고 시간대도 맞아 참석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 무척 반가웠지만, 어쩐지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가능한만큼의 미소와 눈인사를 나눈 후 현수막 뒤에 섰다. 우산과 가방을 내려놓고 녹색 종이를 들었다.

 발언자 분들의 목소리는 엠프를 나오기도 전에 나에게 닿았다. 나란히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한 당원님이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고 했을 땐 내가 정말 그렇다고 외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밀고 도착할 시간이 된 친구를 찾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흥얼거렸고, 잠깐 멈춰 플래카드에 써진 글을 훑어보며 지나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발언은 할 수 없었다. 나는 슬퍼하지 못했고, 충분히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소식들은 피하는 요즘이었다. 자꾸 숙여지는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부끄러운 건 나지 백남기 어르신이 아니니까. 격양되는 목소리와 간헐적인 박수. 무심한 눈빛들과 호기심어린 표정들. 지나는 차들의 새까만 유리창과 비에 젖은 신발들. 그것들 중 몇은 위로였고, 몇은 고독이었으며, 사실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눈물이 대신 설명했다.

 어쨌든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 세계를 내 언어로 이해해야 했다. 작년 11월 쓰러진 것은 그런 것이었다.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팔을 잡아끄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지하철로 향하는 아저씨의 넥타이. 폰을 들여다보다 등짝에 부딪히는 손바닥에 깜짝 놀라 돌아보고 발견한 친구의 장난스런 웃음. 한쪽 어깨에 에코백을 둘러매고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며 퇴근하는 닥터마틴 신발.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그런 일상들을 위해 평생을 싸웠던 어떤 사람. 한 사람의 배우자. 부모. 가톨릭 신자. 농민. 그러니까 우리에게 낯설고 머나먼 고유명사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보통명사와 동사들. 그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낸 삶의 결. 어떤 인생. 사람. 그날 살수차에서 직사된 캡사이신 섞인 물이 겨눈 것은, 317일 동안을 버티다 놓쳐버린 것은, 그리고 지금 그들이 갈라버리려고 하는 영원한 꿈은... 국가는 무엇일까. 무얼 위해 존재하는 걸까. 그 거대한 폭력은 누구에게서 누구를 지키려 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다.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무엇. 존엄.

 나는 지나치고, 기다린다. 그리고 가끔 멈춘다. 말하지 못한다. 어떤 날에는 중얼거린다. 자주 잊고, 어쩌다 기억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늘 고민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멈춰야 한다. 봐야한다. 기억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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