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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희랍어 시간』 어스름 : 소멸과 생성의 시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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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희랍어 시간』 어스름 : 소멸과 생성의 시간

들림 2012. 1. 22. 13:36
희랍어 시간 희랍어 시간
한강 | 문학동네 | 201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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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 입니다.


작가는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만남을 통해 단절과 소외, 소통과 관계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그리고 있다.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 그리고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두갈래 실낱이 마지막에서 만나 새로운 하나의 실을 만들어낸다.

상처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또 모든 것이 태어나는 시간 어스름. 그리고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불교와 플라톤의 사상을 교묘히 배합하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침묵을 여백으로 표현한 시와 같이 전개되는 남자의 대화와 마지막 시점이 1인칭으로 전환되며, 소제목의 번호가 '0'으로 바뀌는 부분은 감탄을 넘어서 질투를 느끼게 한다.

너무 많은 비밀들이 숨어있어서, 몇번이고 넘겨봐도 다 찾지 못할 것 같은 무한無限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 보석같은, 또 괴물같은 소설이다. 한꺼풀 한꺼풀 벗겨나갈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만나면서 동시에 또 새로운 물음에 도달하게 한다.

다만 난해하고 복잡하게 진행되는 전개는 처음 읽는 독자로 하여금 어려움과 어지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만 견딘다면, 『희랍어 시간』만이 가지고 있는 사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플롯, 시점, 문체, 인물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매끄럽게 버려내는 타고난 소설가 한강.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고, 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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