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림 평상
마음 맞이 서먹한 이의 눈빛에도당신의 그림자가 졌다 그의 연인이 저물어가는 속도로연해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이름이 곪던 밤들과그의 눈물은 애들처럼 막 친해졌다 그의 볼에 묻은 당신의 얼룩을휴지를 건네어 닦으려 했다 당신이 깃든 그의 신전에서모든 신앙고백을 봉헌했다 그의 미소를, 미소를, 기도한다내 주름질 입술 끄트머리가 들썩했다
1. 선생님을 실제로 뵙는 것은 2012년 이후 두 번째였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말라보였다. 영상으로 본 송전탑 투쟁과 지난 총선 장면들이 언뜻 스쳐갔다. 그를 알려준 친구가 생각났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부러워했다. 그런 선생님을 만나거나, 그런 선생님이 되었으면 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인사만으로 충분했다. 자세한 얘기는 그저 손을 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날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환영해주는 손이 단단했다. 아프지 않을 만큼 힘껏 붙잡았다. 2. SNS에서만 보던 후보자들을 실제로 봤다. 몇몇은 사정상 오지 못했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큰일을 치르고 난 사람들의 말씨에는 굳은살이 박였다. 그처럼 근기가 입을 빌어 하는 이야..
살게 될 집에 오후 내 머물렀다. 인테리어 업체들은 내부공사 견적을 내려면 현장방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약속 사이 시간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베란다와 연결된 작은 방. 전 주인의 침실이었다. 그녀는 두 벽면에 연분홍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 문은 그보다 진한 핑크색이다. 샹들리에 속의 노란 램프 불빛은 유리조각처럼 흩어졌다. 그림자는 물체의 임종을 비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가구 하나 없는 방은 장면이 전환될 때의 잔상 같다. 얼마 뒤면 이 방에서 잠이 들 것이다. 빗소리는 베란다 슬레이트 천장을 연신 두드렸다. 열어둔 중문을 통해 익숙해질 앞날의 풍경을 살짝 내다본 느낌이었다. 그녀가 칠 하지 않은 하얀 벽지에 기대 한강의 『흰』을 읽었다. 제목처럼 얇은 책이었고, 시처럼 농축된..
22:30~00:00 전파는 개 혓바닥에 수로를 냈다 (꼴깍, 꼴깍)오늘도 가득 고인 말들을 삼키는 고요심해로 추락하는 단어의 치어 떼들 (딸깍, 딸깍)오늘도 다시 출발선에 선 심전도 소리너는 전력질주하는 고래의 숨방울 전선은 실어한 먹구름어미는 종일 겨우 뒷걸음마만 땐다
당신이 싫어하진 않을 것 같은 시 당신은 약으로 시작하는 시간을 못견뎌했다그래서 정도로 끝나는 이야길 섭섭해 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당신은 당신의 모든 문장을 직유했다한 번도 같은 반인 적 없던 동창의 이름을 떠올리듯매사에 미안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당신은 발자국에 물이 고일 때까지 자주 울었다그것도 모르고 나란한 볼우물을 자꾸 채근했다깜빡하면 당신은 마른 모랠 몰래 무궁화처럼 내쉬었다 나는 당신을 약 4년 정도 사랑했다공책에 연필이 닿기도 전에 지운 문장이다아마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 다 나는 고생물처럼 크레이터 안에 쪼그리고 있다한 움큼씩 빠져나가는 성긴 숨들에 매달린 채당신 발목의 기울기를 닮은 성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