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림 평상
어긋난 밤 범어사 아래 주차장은밤이 맑다 “우리……. 별이 다 뜰 때까지만 같이 돌자.”눈치 빠른 그녀는 빈칸도 알아듣고 집행인처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단어는 머리에 손을 넣어 만지는 것만으로 기류가 멈췄다나는 얹힌 바람을 다 토하고서야 겨우 발을 땠다 마주보던 손들은 돌아앉았지만그네에는 궤적의 기억이 있다그 암기력이 무안해 손끝이 시렸다그녀의 투명 메니큐어는 뻔뻔히도 어둔 구석까지 휘휘 저었다 우리에게 지각한 별을 기다릴 인내심은 있었나보다혹시 하나 뒤늦게 도착할까봐혹은 서로가 그렇게 생각할까봐에이사이드든 비사이드든 고장난 레코드판은 잘도 돌아갔다 드디어 산사의 불이 꺼졌다그녀는 한참 텅 빔을 응시했다나는 그녀가 없어진 자리에서 10년은 늙은 이마로별과 별 사이에 시력을 있는 힘껏 던졌다 반짝
(어디여도 괜찮은)서울의 봄 시 읊어주던 선생까지 자릴 비운 날처음으로 야자를 쨌다 점령군이 물러가고난 프라하의 침대 위백색 밤에 잠겼다 원 스트라이크!하나만 더투 스트라이크!그렇지!삑-티비를 껐다곧바로 ㄱ, ㅗ, ㅁ, ㅗ, ㄱ유성매직으로 휘갈긴 장래희망주황불, 엑셀은 바퀴벌레 최후처럼 꿈틀 “해방” 두글자창씨개명 전 이름인 듯 입술 끝으로 받들고기념사진 촬영을 연습한다, 하다가반전된 시곗바늘 아래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서불온한 소문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걸아이 시체 앞 부모처럼 확인한다 결국 쓰레기통 속 종이뭉치라도언제나 혁명의 구호로 적힐아련한 첫문장
물공포증 난 트라우마에서 태어났어 양부모는 반쯤 덜 불행하길 바랐어줄담배와 코 묻은 휴지가 서로를 더듬고 몸을 섞던 날(출생의 비밀) 두 지류에서 흘러온 오폐수 거품이씨앗주머니처럼 펑 하고 터질 때난 발아했어 내 손과 발은 그런 걸 먹고 잘도 자랐지“아무거나 잘 먹어요”손짓발짓으로 거짓말부터 익혔지 그때부터몸속에 발소리가 따라오는 골목이 흘러지독한 스릴러 감독도 로케이션을 포기했다나 장마가 계속되는 철거촌대략 3일에 한 번만 약에 취한 해가 떠손꼽아 기다리는 열흘에 하루소풍날에는 꼭까만 유리창 너머로 빗방울이 잠복근무를 해 난 건기에도 허우적 허우적아마 달에서도 발버둥치다 익사할 거야 누군가 잡아주어 똑바로 서면4등신이라도 숨 쉴 수 있을 텐데 아엄마처럼 아빠처럼살기 싫었어그럴 땐 언제고 결국 더치페이 ..
2016. 3. 20 이제야 왔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막 피어나기 시작한 개나리를 봤습니다. 노란 바람개비들이 줄지어 서있는 그 길입니다. 의경의 안내에 따라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이곳에 근무했다는 친구가 떠올라 잠깐 웃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온통 꽃입니다. 은은한 목련, 고고한 매화, 화려한 홍매화, 아직은 구분이 힘든 생강나무와 산수유. 땅에는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그득합니다. 계절은 사람의 마음과 상관없이 피고 지는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 2008년경이겠지요. 당시 저는 대학교 동기들과 무한도전에 심취해있었습니다. 우리는 매번 특집이라며, 여기저기 쏘다녔지요. 이때 저는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그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 봉하마을 한번 가자..
왜 타인의 고통은 비슷하게 겪어봐야 조금, 조금이나마 가닿을 수 있는 걸까요. 늘 가해자의 입장에서 살았으면서, 잘못을 몰랐고.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고 현행범이었고. 공범이었고. 기득권자였는데 말이죠. 반대로 같은 이유에서, 아플 수 있는 일인데도 아프지 못했습니다. 힘든 건데 힘들지 못했어요. 슬프다 얘기할 수 없었어요.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는데. 애꿎은 사람들에게만 화풀이를 해온 것 같아요. 그것이 특정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였는데. 나의 문제면서, 너의 문제고, 우리의 문제였는데. 남성의 몸으로 기껏 공감할 수 있는 범위가 무척이나 너무너무 협소해서 미안합니다. 그것만으로 힘든데. 다들 어땠을까요. 이것조차 다 말하지 못한 고통, 너무 잔혹한 사건들 사이에서 말하기엔 민망하다고 느껴..